[취재일기] 잡스가 한국서 났다면 … 휴대폰 가게 하다 월세 못 내 쫓겨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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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환
경제부문 기자

퀴즈 하나. ‘만약 스티브 잡스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네티즌들이 가장 많이 공감한 답은 ‘휴대전화 가게 주인 하다 월세에 밀려 쫓겨났을 것’이었다. 척박한 국내 청년창업 환경을 그대로 보여준 대답이었다. 본지는 청년창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기획기사 ‘청년창업, 실패를 허(許)하라’를 게재했다. <본지 9월 5일자 1·4·5면, 6일자 4·5면, 7일자 12·13면>

특히 ▶에인절(angel) 투자 생태계 확 바꾸자 ▶실패해도 신용불량자 안 되게 하자 ▶‘창업 아이디어 인증제’를 도입하자 ▶창업 문화 운동을 벌이자 ▶2012년 총선·대선 이슈로 삼자를 5대 어젠다로 제안했다.

 그러자 첫날 기사에만 댓글 수십 개가 달렸다.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선 ‘스티브 잡스 퀴즈’를 바탕으로 한국의 창업 환경을 비꼰 댓글이 ‘베플’(베스트 리플:최고 인기 댓글)로 꼽혔다. 다른 댓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척박한 창업 환경을 지적하거나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자조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우린 또 이렇게 젊은 인재를 놓치고, 앞으로도 계속 놓칠 것이다’(현실낭만주의자) , ‘청년들에겐 창업보다 대기업에 취업하는 게 지상 과제가 됐다’(황슬기), ‘인재를 망치는 구조, 아이디어를 묻어버리는 구조,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구조, 돈 안 되면 지원하지 않는 구조’(윤태호).

 본지 특별취재팀이 인터뷰한 청년 창업가들도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대학생을 위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개발해 ‘연매출 10억원’ 최고경영자(CEO)가 된 박수왕(26) 소셜네트워크 대표는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부러워했던 적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기사가 나간 직후 정부와 한나라당에서는 대책을 내놨다. 청년창업 지원 예산을 2400억원에서 4900억원으로 크게 늘린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실패한 창업자의 빚도 최대 2000만원까지 탕감해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만들어 준다는 내용도 있었다.

 첫걸음을 뗐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회성 지원이 아니다. 양현봉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돈을 푼다면 청년들이 창업에 뛰어들 순 있겠지만 오랫동안 살아남는 기업을 만들긴 어렵다”며 “사전 지원뿐 아니라 사후관리·컨설팅에 집중해 미국의 실리콘밸리 같은 창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취재팀으로 전화를 걸어 “중요한 이슈를 잘 짚어줘서 고맙다. 청년창업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번만큼은 말로 끝내선 안 된다. 청년창업이 내년 총선·대선 이슈가 돼 지도자들이 청년 일자리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잡스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도 월세에 허덕이다 쫓겨난 휴대전화 가게 주인이 아니라 애플 같은 회사를 만들 수 있도록.

김기환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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