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번째 편지 <밥먹기의 어려움>

중앙일보

입력

한동안 연락이 없군요. 그날 광화문에서 당신과 헤어지고 돌아와 다음날 벚꽃을 구경하러 하동 섬진강 쌍계사로 내려가려다 몸살을 얻어 며칠 누워 있었습니다. 황사 바람에 날씨가 건조한 탓인지 목이 아파 물조차 마음껏 삼킬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에 목이 타는 갈증에 깨어났지만 불을 켜고 주방까지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면 누가 옆에서 물이라도 끊여주면 좋겠다 싶습니다. 혼자 있으면서 가장 외로울 때는 이렇듯 몸이 고단하고 아플 때입니다.

또 하나는 밥먹기의 어려움입니다. 대학 때부터 나는 줄곧 자취를 해왔는데 거의 '굶취'에 다름아니었습니다. 여자들은 어쩐지 잘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혼자 있으면 우선 안 해먹게 됩니다. 어쩌다 시장을 봐와 요리책을 뒤적거려 음식을 만들어보지만 결코 맛이 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음식은 만들기가 매우 까다롭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맛을 내기까지는 손가락 열개에 음식 냄새가 모두 배어야 합니다. 우리 음식 솜씨는 나이와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고추장과 된장맛이 그 대표적인 것이고 김치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어쨌거나 식탁에 앉아 수저를 집어들지만 음식을 만드는 동안 냄새를 맡아 입맛이 없습니다. 밥이란 혼자 먹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깨닫습니다.

더군다나 한식은 찌개를 중심으로 곁반찬을 상에 놓습니다. 숟가락을 번갈아 찌개그릇에 담가 떠먹게 돼 있습니다. 그러다 종종 숟가락이 서로 부딪치기도 합니다. 함께 먹는 것을 전제로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린다는 얘깁니다.

한국인의 정서는 이렇듯 밥상에서 비롯됩니다. 거기서 질긴 유대가 형성됩니다. 차 안에서도 혼자 먹을 수 있는 햄버거와는 여러모로 다릅니다.

대개 혼자 사는 사람들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며 밥을 먹습니다. 식탁을 외면하고 말입니다. 어떤 이는 텔레비전 위에 모자를 올려놓고 사람보듯 하며 밥을 먹는다고 합니다. 얼핏 청승을 떠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비나 눈이 오는 날 저녁에 혼자 식탁에 앉아 있을라치면 털없는 원숭이가 된 기분이 됩니다. 몸이 아픈 날은 진저리가 날 정도입니다.

밥을 해먹는 정도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혼자 있으면 주로 사먹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엔 실로 여러가지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혼자 식당에 가면 주인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음식상은 함께 먹는 걸 전제로 차려지기 때문에 독립군이 나타나면 얼굴빛이 달라집니다.

심지어는 뻔히 혼자온 것을 알면서도 1인분요? 하고 퉁명스럽게 확인을 합니다. 설렁탕이나 냉면을 먹을 때는 그래도 덜한 편인데 한식을 시키면 상에 반찬 그릇을 놓은 소리부터가 좋지 않습니다. 꼭이 얻어먹으러 온 기분입니다. 압니다. 한정식 1인분을 팔아 남는 게 없다는 걸 말입니다.

하지만 하루 세 끼 혹은 두 끼를 설렁탕이나 냉면으로 때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때로는 된장찌개나 순두부가 먹고 싶고 물론 고기가 먹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고기 얘기가 나와서 하는 얘긴데 언젠가 식당에 들어가 삼겹살을 시켰더니 1인분은 팔지 않는다고 점잖게 쫓아내더군요. 때마침 밖엔 저녁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삽겹살에 소주 한잔이 간절히 그리운 저녁이었던 것입니다.

서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나는 바로 옆집으로 쳐들어가 삼겹살 2인분을 시켰습니다. 알다시피 돼지고기나 소고기 1근은 600g입니다. 음식점에서는 200g을 1인분으로 정해놓고 팝니다. 그러니 400g을 시킨 것입니다.

그랬더니 종업원 왈 "혼자서 이걸 다 드실려구요?"하면서 야릇하게 웃는 게 아닙니까. 사실 나는 양이 많지 않습니다. 200g이면 솔직히 충분합니다. 개중에는 1근을 다 먹어치우는 남자들도 있다지만 나는 통닭도 반마리를 다 먹지 못합니다. 누구처럼 씨름 따위는 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다 나는 소식주의자인 것입니다.

삼겹살 2인분을 아귀처럼 억지로 먹고 있으려니 왠지 기가 막힙니다. 종업원이 팔짱을 끼고 이쪽을 흘끔거립니다. 그러다 슬그머니 다가와 밥은 안 먹어요? 라고 묻습니다.

사실 돼지고기를 먹고나면 느끼해서 된장찌개와 밥으로 좀 눌러줘야 속이 편합니다. 밖엔 낭만적으로 눈이 내리고 있는데 본의 아니게 혼자 포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인분을 시켜놓고 또 다른 눈치가 보여 1인분을 남길 수도 없습니다. 이게 뭡니까?

음식점을 나오는데 임산부처럼 배가 불러 숨조차 쉬기 힘듭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뒤뚱거리며 집으로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나는 소화를 시킬 겸 계단을 통해 8층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다 5층쯤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숨이 차오르며 구역질이 나옵니다.

결국 계단 가드레일을 부여잡고 삼겹살 2인분과 된장찌개와 밥을 모두 시멘트 바닥에 반환하고 맙니다. 봉걸레를 가지고 내려와 밤청소를 합니다. 정말 이게 뭡니까.

자청해서 이런 수모를 겪고 나면 또 밥을 해먹어야지 라고 결심하게 됩니다. 국가고시에 여러 번 낙방한 사람처럼 다시 요리책을 뒤적거립니다. 차를 몰고 시장에 갑니다. 카트를 밀고 다니며 무려 일 주일치의 양식을 삽니다.

그러나 결국 6일치 정도는 버리게 됩니다. 아깝습니다. 무엇보다도 농어민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죄없이 죄인이 되어 갑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결혼의 가장 좋은 점은 함께 밥을 먹을 사람이 늘 존재한다는 것이야."

그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밥이나 빨래 때문에 어느 한사람에게 인생을 저당잡히고 살 수는 없다고 함부로 떠들고 다닐 때입니다. 얼마 전에는 역시 독신인 친구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밥을 누가 짓느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야. 함께 먹는다는 것 자체가 긍휼하고 고귀한 일이지."

그 말에 이젠 나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가끔 나도 밥을 지어봐서 압니다. 그런데 막상 먹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밥이란 누군가를 먹이기 위해 지을 때 솜씨도 늘고 인품도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생이란 누군가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혼자 사는 사람이 심플하고 멋있어 보일지는 몰라도 그 안은 각박하고 황량한 까닭이 여기게 있었던 것입니다. 매일같이 밥먹기의 어려움에 시달리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마음을 부드럽게 보겠습니까?

당분간은 열심히 해먹기라도 하면서 생을 다시 반추해 봐야겠습니다.

소식 바랍니다. 아침에 몸살기가 빠져 나갔지만 혼자 꽃을 보러 갈 마음이 왠지 더뎌지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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