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 한국판 新경제 ‘신기루’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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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新경제의 꽃이 필까. 고성장-저물가-저실업으로 특징 지워지는 신경제가 한국에서도 꿈틀대고 있다. IMF 관리체제 뒤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한국 경제가 경기순환론적인 관점을 떠나 신경제적인 특질을 보이고 있는 것. 경제구조 개혁의 기반에서 벤처기업을 주인공으로 다지고 있는 디지털 경제가 미국의 경험과 어딘지 닮아 있다. 그러나 10년 넘게 기반을 다진 미국 신경제에 견줘 보면 한국판 신경제는 여전히 신기루일 뿐이다. 경제구조 개혁과 여기에 근거한 IT투자가 이뤄지지 않았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정보통신 인프라도 아직 미미한 실정. 또 대기업과 중소기업, 전통기업과 벤처기업간의 역할분담과 조화도 아직은 삐걱거리는 상태다. 올해 금융 구조조정, 인플레, 재정적자를 비롯해 숱한 난제들도 길을 꽉 가로막고 있다. 신경제는 한국주식회사를 다시 일으켜세울 것인가. 그 가능성과 문제점, 전망을 짚어봤다.

'신 경제'의 부푼 꿈은 일장춘몽이었나.

미국 나스닥 폭락에 코스닥 시장이 한바탕 요동치며, 우리나라에도 성큼 다가온 것 같던 신경제가 주춤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벤처주식 거품론에 이은 주가급락이라 이같은 우려가 더 힘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벤처로 간 사람들의 환류가 시작됐고, 창투사들도 보수적으로 돌아서고 있다. 일확천금의 환상에 젖어 있던 투자자들도 마침내 인터넷 기업의 미래가치에 회의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B2B(기업간 전자상거래)
시장의 주도권 선점을 노린 구경제의 반격도 심상치 않다. 신경제의 핵심영역인 B2B의 주역은 첨단 인터넷 기업이 아니라 전통 굴뚝산업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국내에서도 동시에 감지되고 있다. 한국판 신경제는 신기루였나. 신경제는 과연 오는 것일까. 신경제의 주역격인 벤처들에 대한 시각교정이 이루어지면서 이같은 의문은 꼬리를 문다. 얼핏 보기엔 한국경제가 물가안정 속 고성장이라는 미국의 신경제를 닮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정보기술(IT)
혁명의 성과가 눈부시다.

지난해 경제성장률(10.7%)
에 대한 IT산업의 기여도는 38.3%, 국내총생산(GDP)
중 지식기반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5%에 달했다. 지식·정보 지표상으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고 한국은행은 밝히고 있다. 홍익대 박원암 교수(경제학)
는 그러나 한국이 미국과 다른 점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선 지난해 이래 고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우리 경제는 아직은 호황의 초입에 있다. 경제체질의 약화로 물가 불안요인도 잠복하고 있다.

고성장과 저물가의 ‘환상의 2중주’가 얼마나 지속될는지 지금으로서는 내다보기 어렵다. 미국식 신경제로 규정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것이다. 전후 최대의 장기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에서조차 지금의 국면을 신경제로 볼 것인지를 둘러싸고 기업인과 경제학자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도 그렇지만, 정보통신산업의 호황으로 수출이 늘어나기보다는 외국으로부터의 기술 도입이 늘고 소비가 촉발돼 경상수지가 오히려 악화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미국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외자를 자유로이 조달할 수 있지만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경상수지 악화는 경제불안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다. IMF 체제 이후 위축된 R&D(연구개발)
투자도 아직 살아나지 않았다. 기술개발을 최우선으로 하는 신경제에서 R&D 투자는 필수다.

한편 나스닥과 동조화현상을 보이고 있는 코스닥 시장에 대해서는 시각조정이 필요하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나스닥 폭락의 여파로 지난 4월18일 1백66.99까지 하락한 코스닥 지수가 1백을 넘어선 것은 지난해 4월14일이다. 1년 만에 70%나 급등한 것이다. 상승률로 따지면 더더욱 얘기가 달라진다. 지난해 코스닥 지수의 상승률은 나스닥(86%)
의 무려 3배에 육박하는 2백40.7%였다. 동조화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나홀로 급등이란 표현이 어울린다.

코스닥의 경우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나돌고 있는 상황이다. 나스닥 기업들의 실적이 발표될 때 기대치보다 이익이 안 나 찬바람이라도 불면 한국은 독감이 아니라 아예 몸져 누울 것이란 우울한 시나리오다. 신경제에 대해서는 낙관론도 있다. 아직은 국내 일부 벤처회사들 얘기라 공감대가 크지 않지만 국제경쟁력을 갖춘 신생 벤처스타들이 탄생할 가능성이 커 지금 상황에서 비관만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박원암 교수는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며 “조정과정을 거치면 우리 경제가 더 건실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조정국면 돌입을 마치 큰 일이라도 난 듯이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과(過)
기대에서 비롯된 오판이므로 이 과정을 잘 넘기면 우리도 신경제를 추구할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분명한 것은 한국판 신경제의 싹은 이미 텄다는 사실이다. 꽃을 피울 수 있느냐는 ‘지금부터’에 달려 있다. 개화(開花)
의 전제는 경제구조 개혁의 완결이다. 구조개혁은 미국도 80년대 이래 10여년 매달린 대역사(大役事)
다. 무엇보다 시장원리에 충실한 자유경쟁원칙이 존중돼야 한다. 재벌이든 벤처든 마찬가지다. 정부는 개입과 간섭보다는 엄정한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한다. 대기업이든 신생기업이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인프라와 기업문화를 가지지 않으면 신경제는 흉내내기에 그칠 것이다. 은행·투자신탁회사 등의 2차 구조조정도 제대로 마무리돼야 한다. 벤처와 굴뚝산업이란 2분법적 구도를 청산하고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도 신경제 착근의 전제조건이다. 미국서 날아온 신경제 꽃씨가 과연 한국적 토양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인가? 민·관·정이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이필재 기자 <이코노미스트 5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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