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리서 각국 다퉈도 기자들은 ‘국제 연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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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호 14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007년 유엔 안보리 회의실 옆 복도의 간이 회견장에서 유엔 출입기자들과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 첫 번째 얼굴을 숙이고 있는 기자가 필자다.

지난달 30일 미국 뉴욕 유엔 본부 2층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장 옆 널찍한 복도. 붉은 터번을 두른 하디프 푸리 주유엔 인도대사가 나타났다. 수십여 명의 취재진이 즉시 모여들었다. 순번제 안보리 의장인 푸리 대사는 유엔 로고가 새겨진 하늘색 백보드 앞에 섰다.

전 유엔 주재 기자협회 부회장이 겪은 ‘출입처 안보리’

“안보리 회원국들은 오늘 아프리카 기니 만에 출몰하는 해적 소탕을 위해 종합대책을 마련키로 했다.” 2분 정도 짧은 브리핑 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런데 엉뚱했다.
“나토가 ‘리비아 정세에 대한 자체 판단에 따라 계속 개입할지를 결정하겠다’고 했는데 내정간섭하겠다는 뜻 아닌가.” 브리핑엔 관계없이 묻고 싶은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세계의 온갖 관심사 가운데 자국 현안에 집중하는 안보리 취재 현장의 전형적 모습이다.

기자가 뉴욕 특파원으로 유엔을 취재했던 2006~2009년 안보리에선 숨가쁜 상황이 여러 번 있었다.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당시도 그랬다. 세계는 ‘불량국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됐다’는 데 경악했다. 세계의 눈이 안보리로 집중됐다. 북한 편만 들었던 러시아와 중국도 그때는 달랐다. 유엔 출입기자들, 특히 한국과 일본 취재진에겐 수년 만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기자를 포함한 취재진 수십여 명은 안보리 앞 복도에서 몇 시간씩 기다렸다. 회의 틈틈이 외교관들이 나오면 우르르 몰려가 질문을 퍼부었다.

이런 대형 사건이 터지면 각국 기자들은 ‘상부상조’ 체제를 발동한다. 안보리 대북 제재 초안을 자국 외교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국·일본·미국·중국 기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정보를 나누며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곤 한다. 북한 문제에 대해선 일본 언론도 한국만큼 민감하다. 그래서 한·일 언론 간 긴밀한 합동작전이 벌어진다.

안보리 회의장 밖으로 일본 외교관이 나오면 일본 기자들이 달라붙어 취재해 이를 한국 기자들에게 알려준다. 대신 한국 기자들은 남북 외교관의 주요 발언을 전해준다. 미·북 대표가 뉴욕 모처에서 만난다는 정보가 들리면 한·일 기자들이 몰려가 진을 쳤다. 출입구가 여럿인 큰 건물이면 국적을 불문하고 기자들끼리 팀을 짜 다른 문에서 대기하고 취재 내용을 서로 알려줬다. 안보리 회의장에선 국제 갈등이 벌어졌지만 회의장 밖 언론은 ‘국제 협력’의 모델을 만들었다.

유엔의 명목상 최고 기관은 193개 회원국으로 이뤄진 총회다. 그러나 미국·중국·러시아·영국·프랑스 5대 강국에 각 대륙을 대표하는 10개국으로 이뤄진 안보리가 사실상 최고 의사결정 기관이다. 5개 상임이사국이 거부권을 갖고 있어 안보리 합의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결정이라도 물거품이 된다. 이 때문에 1000여 명이 넘는 유엔 취재기자의 눈과 귀는 안보리로 쏠린다.

유엔에선 세계 각국의 국익이 첨예하게 부딪혀 출신국별로 관심과 이해가 다르다. 예컨대 중국의 국영 인민일보나 신화통신 기자들은 공보 담당 공무원과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북한 핵실험 사태 때 이들은 “지나친 대북 제재는 도리어 아시아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중국 외교부 입장이 그랬다. 반면 미국·유럽 기자들은 감시 기능을 중시한다. 2008년 유엔 주재 쿠바 기자가 휴가 뒤 돌아오려는데 미국 정부가 비자 발급을 거부하자 미국 기자 다수가 “미국 정부가 언론자유를 억압한다”고 나섰다.

이런 다양한 기자들을 한데 묶어 상부상조하도록 만들어진 단체가 ‘유엔기자협회(UNCA)’다. 기자가 2008년 한 해 부회장을 맡았던 UNCA는 유엔 출입기자 가운데 200여 명이 정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당시 회장은 독일 dpa 통신사의 튀에트 뉘엔 특파원, 다른 2명의 부회장엔 미국 이너시티 프레스의 매슈 리, 폭스TV의 프랭크 우치아르도가 뽑혔다. UNCA 회장단에 한국 기자가 뽑힌 건 20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당시 기자는 반기문 총장이 유엔 수장이 된 만큼 유엔 언론단체 내 한국의 역할도 커져야 한다는 생각에 출마했었다.

UNCA는 매년 유엔 측과 협의해 본부 건물 내 언론인 출입금지 구역을 정하고 브리핑 형식 등을 조정한다. 때론 “유엔 간부들의 대언론 설명이 부실하다”는 것 같은 불만사항을 전하기도 한다. 또 매년 연말 각국 외교관과 기자들이 참석하는 송년 파티도 주최한다. 이 자리엔 유엔 사무총장이 참석해 연설하는 게 관례다. 반기문 총장도 취임 첫해인 2006년 UNCA 연말 파티에서 가사를 바꾼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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