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조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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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호 29면

한국의 ‘부자’는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한국인의 심리코드를 쓴 황상민 연세대 교수의 연구 결과가 흥미롭다.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부자는 십중팔구 부정적이다. ‘운 좋게 한탕 한 사람’ ‘쩨쩨한 사람’ 그리고 ‘외로운 사람’ 등으로 주로 연상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부자를 몹시 부러워한다. 그러나 돈만 떼어놓고 나면 별로 닮고 싶지 않은 존재로 인식한다. 다름 아닌 ‘반(反)부자 정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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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연구나 미디어 등을 보면 미국·유럽 등 선진국 사람들의 부자에 대한 인식은 한국과 너무 다르다. ‘멋진 사람’ ‘똑똑한 사람’ ‘따뜻한 사람’ 등 긍정적 정서가 앞선다. 돈 버는 과정도 그렇지만, 쓰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 게다.

선진국 부자라고 원래 좋은 이미지를 가졌던 건 아니다. ‘악의 화신’으로 인식됐던 역사가 훨씬 길다. 미국이 산업화에 급피치를 올렸던 19세기 후반 미국인들은 신흥 부자들을 ‘강도 귀족(robber baron)’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경쟁자를 무자비하게 짓밟고 노동을 착취하고 환경을 파괴한 자들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오늘날 미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앤드루 카네기나 존 D 록펠러도 당시엔 그랬다.

이들이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된 계기는 기부 활동이었다. 노년의 강도 귀족들은 자신의 이름을 단 자선재단을 만들어 거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자신이 일군 기업도 자식이 아니라 시장과 전문경영인들에게 맡긴 경우가 많았다. 왜 그랬을까? 죽어서까지 악당 소리는 듣기 싫었을 인간적 고뇌, 미국 자본주의를 온전히 발전시키기 위한 정치적 압력 또는 사회적 합의 등이 어우러진 결과로 역사학자들은 해석한다.

그런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주도하는 나눔 실천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미국 부자들을 대상으로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자는 서약운동을 펼치고 있다. 목표 금액이 무려 6000억 달러(700조원)다. 선진 각국의 수퍼 리치들은 요즘 국가 재정위기의 타개를 위해 세금을 더 내겠다고 나선다.

아름다운 기부 문화는 한국에도 확산되고 있다. 일부 재벌 총수와 연예인들이 앞장서고 있다. 그래도 아직 갈 길은 멀다. 대다수 부자는 여전히 상속·증여세를 아끼며 재산을 자식들에게 넘겨줄 궁리에 여념이 없다. 기부 관련 법규도 엉망이다. 기부 행위에 엉뚱한 세금을 붙이기 일쑤고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확인하기도 힘들다.

한국의 연간 민간 기부액은 국내총생산(GDP)의 0.2%에 불과하다. 미국(2%)과 비교해 1인당으로 따져 10분의 1밖에 안 된다. 영국 자선구호재단과 갤럽이 만든 세계기부지수(WGI)를 보면 한국은 조사대상 153개국 중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나란히 81위에 올라 있다. 부자들이 제 잇속만 챙긴 나라 치고 선진국이 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공동체가 허물어질 때 더 크게 잃을 쪽은 부자들일 수 있다. 재산을 오래 지키기 위해서도 나눔 실천은 필요하다. 존경과 행복은 저절로 생기는 보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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