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고상하게, 애틋하게, 격렬하게 … 시대 넘어선 사랑 방정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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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역사에 사랑을 묻다
서지영 지음, 이숲, 324쪽
1만5000원

조중환의 신소설 『장한몽』(1913년)은 ‘사랑에 울고, 돈에 속는’ 신파 멜로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대동강 부벽루를 무대로 매달리는 심순애와, 그걸 뿌리치는 약혼자 이수일 이야기는 메이지 일본의 연애소설 『금색야차』를 번안했다. 그럼에도 20세기 러브스토리 중 최대 히트작이라서 신파극·가요·영화로 두루 선보였다. 그 작품은 황금만능 세태에 대한 풍자일까?

 그런 통념을 살짝 비튼 『역사에 사랑을 묻다』의 해석이 썩 참신하다. 우리 전통에는 없던 ‘낭만적 사랑’을 모색한 첫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럼 낭만적 사랑이란 무엇인가. 서구 시민계급이 추구했던 근대적 애정관, 즉 한 사람에게 바쳐지는 불멸의 열정을 말한다. 이 소설을 기점으로 연애란 신조어도 이 땅에 상륙했다. 『장한몽』과 함께 나온 『쌍옥루』 역시 근대적 학교를 무대로 펼쳐지기 때문에 『춘향전』 러브스토리와는 맛과 질감이 달랐다.

1930년대 카페 여급은 도시 문화를 주도한 ‘모던 걸’의 일원이었고 근대식 연애의 파트너였다. 사진은 일본 작가 오타 사부로의 ‘카페 여급’(1912~15).

 실은 연애란 어휘는 일본의 번안물. 영어 ‘love’, 불어 ‘amour’의 번역어로 출발했는데, 그럼 옛 청춘들에게는 연애란 게 없었단 말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신조어 연애는 남녀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는 기존의 정(情)·색(色)·애(愛) 등의 어휘를 단숨에 밀어냈다. 정·색·애 등이 열등한 정욕을 전제로 했다면, 연애는 “고상한 감정”(132쪽)이라서 한 수 위의 신식에 속했다.

 식민지의 청춘들은 연애에 뻑 갔다. 그걸 자유연애란 말로 확대시켰고,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 직전 ‘조선의 젊은 베르테르’인 작가 이광수가 작품 『재생』에서, 그리고 염상섭이 『사랑과 죄』등에서 자유연애를 다뤘던 탓이다. 식민지 조선에 이식된 뒤틀린 근대, 그러나 한편으로 매혹적인 공기를 호흡하던 모던보이·모던걸들이 일단 열광했다.

 이미 뒤바뀐 세상이지만 그게 만만치는 않았다. 가끔 시대와의 불화에 좌절한 청춘들의 동반자살이 정사(情死)란 이름 아래 이 땅에 번져갔다. 1926년 극작가 김우진과 소프라노 윤심덕이 현해탄에 몸을 던졌고, “장안 늙은이나 어린아이의 화제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그 전후에도 잇따랐던 정사란 에도시대 이후 일본에 등장했던 새로운 사회풍조이기도 했다.

 의문이 또 생긴다. 조선시대에는 동반자살 같은 게 없었을까. 있었다. 단 “유교의 예(禮)가 뿌리내렸던 전통사회에서 정사란 사회 이슈조차 되지 못했다”(255쪽) 이 책 부제는 ‘한국문화와 사랑의 계보학’. 근대 이전이 절반 분량인데, 고전 『시경(詩經)』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경』에 숱한 알콩달콩 러브스토리가 왜 동양적 사랑의 근원인가를 분석한다. 좋은 외모에 덕성까지 갖춘 군자·요조숙녀 사이 사랑의 판타지는 확실히 시대를 초월한다.

 결론, 국문학 쪽에서 접근한 이 책은 미시사와 다르기 때문에 ‘주제 개척상’ 후보감이다. 즉 일제강점기 『신여성』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유와는 구분된다. 문제는 글쓰기 스타일이다.

이화여대 교수인 저자는 이렇게 달콤한 이야기를 왜 이처럼 살벌하고 무미건조하게 썼을까. 글쎄다. 우선 페미니즘 강박증에서 저자가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여기에 우리 학계 특유의 논문식 글쓰기의 병폐가 도졌다. 그게 좀 안타깝지만, 좋은 책은 분명하다.

조우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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