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신라면 블랙’ 아웃 … 공정위는 책임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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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진
경제부문 기자

‘신라면 블랙’이 넉 달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지난 4월 갓 태어나선 온 나라 관심을 독차지하더니 두 달 만에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이유는 하나다. 너무 비싸다는 거다.

 신라면 블랙의 생산 중단을 놓고 설(說)이 분분하다. 우선 농심의 가격 책정이나 마케팅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나온다. 분명한 건 6월 말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 조치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공정위는 ‘설렁탕 한 그릇의 영양을 담았다’는 광고를 문제 삼았다.

가격을 제재할 직접적 수단이 없으니 우회적인 제재 방법을 택한 거다. 범죄 수사를 위해 이와 관계없는 다른 죄목으로 피의자를 구속하는 검찰의 별건구속(別件拘束) 같은 행태다.

 당시 과징금은 미미했으나 효과는 컸다. 6월 60억원이었던 매출이 7월 정확히 반토막 났다. 농심은 일단 “매출이 너무 적어 생산할수록 손해가 난다”며 생산을 중단했다. 하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물가 올린 주범으로 몰아가는 여론이 부담스러워 프리미엄 시장에서 서둘러 발을 뺀 것이다.

 식품 업계엔 신라면 블랙 이전에도 이미 프리미엄 제품이 많았다. 제과업계는 성분을 조금만 바꾸고 ‘건강한 과자’ 운운한 신제품을 지금도 앞다퉈 출시하고 있다. 분유 업계는 프리미엄 제품이 전체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왜 신라면 블랙만 집중 공격을 받았을까. 라면은 과자나 분유와 달리 서민의 주식으로 여기는 인식이 우선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식품업계 관계자는 “하필 정부의 물가 안정 강조 기간에 출시된 게 문제였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미운 털이 박혀 ‘시범 케이스’로 퇴출된 셈이라는 얘기다.

 식품업계는 신라면 블랙이 남긴 ‘교훈’에 술렁이고 있다. 한 대형 식품업체 관계자는 “정부의 최대 관심이 ‘가격’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며 “프리미엄 제품은 개발비·원료비 등으로 비쌀 수밖에 없는데 가격은 올릴 수 없으니 당분간 프리미엄 제품을 출시하는 업체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맛과 성분은 차이가 없는데 비싸기만 한 제품이라면 소비자가 먼저 외면한다. 공정위가 미리 색안경을 씌울 일이 아니다.

임미진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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