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미묘한 시기 미묘한 지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8월 물가는 예상보다 높은 수준일 것이다.”(8월 25일)

 “이달 수출은 일시적으로 주춤할 수 있다.”(8월 29일)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최근 ‘8월의 지표’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내용이다. 정부 경제팀장이 확정되지 않은 지표를 이처럼 ‘중계 방송’하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시장의 과잉반응을 막기 위한 일종의 ‘예방주사’ 성격이다. 8월은 글로벌 재정위기가 터진 예민한 시점이라 시장은 잔뜩 긴장하며 그 성적표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쏟아질 숫자들이 미묘하다. 무역 흑자는 크게 줄고, 물가는 정점에 달할 전망이다. 박 장관이 “물가와 수출입 실적, 외환보유액이 발표되면 (경제 상황이) 상당히 안 좋다는 오해를 불러오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한 이유다.

 31일에는 ‘예고 방송’까지 했다. 7월 산업생산이 3개월 만에 전달 대비 줄어들었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 박 장관은 “예산집행 축소와 호우, 여름휴가 등에 기인한 측면이 있다. 8월 하순 이후에는 지표가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박 장관은 “우리 경제의 하방 위험이 커지고 있으나 수출과 내수여건 등을 감안할 때 완만한 회복세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에 대한 우려가 점차 커지고 있지만 정부는 이처럼 “좀 더 지켜보자”는 ‘신중모드’를 유지하고 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현재 지표에서 나타나는 ‘이상신호’들은 일시적·계절적 요인의 영향이 크고, 경제운용 방향을 바꿀 만한 가시적인 변화는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두 번째는 물가 압박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뾰족한 경기 대응 수단이 없다는 현실적 여건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가, 현존하는 위험”=소비자 물가상승률은 8월 정점을 친 뒤 9월 이후로는 3%대로 고개를 숙일 것이란 게 정부의 예상이다. 이 경우 4%로 전망한 올 물가상승률도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는 물가 압력 자체가 낮아진다기보다는 ‘기저효과’ 덕이다.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8월까지 2%대를 유지하다 9월(3.6%), 10월(4.1%) 등으로 급등세를 탔다. 바닥이 높아지니 전년 대비 상승률은 자연히 낮아진다.

 문제는 체감물가의 고통이 여전할 것이란 점이다. 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앞으로도 물가 상황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시적으로 뛴 농산물값 등은 점차 잡히겠지만 물가 상승세가 개인 서비스 등으로 확산되는 양상이 그리 쉽게 꺾이기는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다. 반면 성장에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시각이다. 이 관계자는 “성장률이 4%대라면 괜찮은(decent) 수준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수출, 아직은 선전”=7월 63억 달러에 달했던 무역흑자는 8월 큰 폭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하지만 무역을 총괄하는 지식경제부 관계자들의 표정은 생각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재정위기의 여파라기보다는 ‘7고(高) 8저(低)’라는 계절적 현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8월 휴가철을 앞두고 수출업체들은 7월에 미리 당겨 수출을 하는 경향이 있다. 지경부 고위 관계자는 “수출 현장을 수시로 점검하고 있지만 눈에 띄는 적신호는 아직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 현재까지 수출입과 관련해 지경부 내 가시적인 변화는 당초 11월 중으로 예상했던 ‘무역규모 1조 달러’ 달성 시점을 연내로 한 발짝 늦춘 정도다.

 ◆“내년 이후가 문제”=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정부의 정책 기조가 물가에서 조금씩 성장으로 이동할 것으로 점치고 있다. 선진국의 재정위기가 하루아침에 풀릴 문제가 아닌 데다, 경기 위축의 효과도 점차 뚜렷해질 것이라는 예상에서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당장 더블딥(경기 재침체)이 닥칠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내년 이후가 문제”라면서 “정부 정책도 물가에서 성장 쪽으로 조금씩 옮겨가면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문제는 대응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윤창현(경제학) 서울시립대 교수는 “신용평가사들의 재정에 대한 기준이 엄격해진 탓에 과거처럼 정부가 대규모로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긴 어려운 여건”이라면서 “충격에 대비해 재정과 외환건전성을 챙기는 등 가능한 한 대비를 충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조민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