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93) 다시 만난 신상옥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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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곰살궂은 성격이 때론 도움이 된다. 평소 강하게 보이는 나의 또 다른 이면이다.

 1967년 하반기 어느 날, 신상옥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신 감독은 59년 나를 영화계로 끌어준 은인이다. 62년 전속계약 만료(3년)로 내가 신필름을 떠난 후로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나를 냉랭하게 대했다. 매년 설날 세배하러 가면 인사를 받기는 했지만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나는 무릎 꿇고 앉아있다가 다른 손님이 오면 그 틈을 보아 자리를 떴다. 서먹서먹하고 어려운 관계였다.

 5년 만의 부름이었다. 원효로 신필름 사무실로 갔다. 신필름은 59년 광화문 조선일보 뒤편, 62년 을지로, 60년대 후반 원효로, 73년 허리우드극장으로 사무실을 계속 옮겨 다녔다. 신필름 역시 톱스타가 된 나를 쓰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신 감독이 ‘내시’ 시나리오를 주면서 같이 하자고 했다. 읽어보니 작품이 좋았다.

 신 감독은 일을 전격적으로 했다. ‘영화계의 제왕’인 그가 마음 먹으면 곧 작품이 만들어졌다. 나 역시 가장 바쁠 때였다. 신 감독의 작품이기에 다른 스케줄을 다 미루면서 네 번이나 그 쪽 편의에 맞춰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필름에서 진행을 보던 친구가 집에 찾아와 대뜸 말했다.

 “오늘 촬영해야 합니다. 우리 오야지가 부릅니다.”

 ‘오야지’는 일본어로 아버지를 뜻한다. 신 감독을 가리켰다. 두목이라는 ‘오야붕’보다 무게감 있는 말이다. 나는 신필름의 스케줄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다. 신 감독이 부르면 내가 꼼짝 못한다는 걸 그는 잘 알았다.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야, 오늘 네 군데나 촬영 있어.”

 “오야지가 부르는데 안 갑니까.”

 그가 눈을 부릅떴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었다. 나는 “이제부터 스케줄 잡고 진행해”라고 소리쳤다. 그 친구의 뺨을 두세 대 때렸다. 그가 회사에 가서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1주일짜리 진단서를 떼어와 나를 고발했다. 고발 주체는 신필름이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난 나대로 촬영을 다녔다. 연예계가 여러 폭행 사건으로 시끄러울 때였다.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강력부장 이모 검사와 마주했다. 그는 자기 회전의자의 1/3 정도만 차지할 정도로 체격이 왜소했다. 나를 보자마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신성일이야. 그렇게 힘이 좋아. 왜 사람을 패고 그래.”

 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왜소한 그가 되레 정겹게 보였다.

 “혼나봐. 약식기소 2주, 유치장이야. 벌금은 1주에 3만5000원씩, 2주에 7만원.”

 7만원이라면 당시 상당히 큰 액수였다. 카랑카랑한 목소리 가운데서 나를 좋아하는 느낌이 들었다. 곰살궂게 굴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저씨!”

 “이 놈아, 어디서 아저씨라 그래?”

 이 검사는 어이 없다는 듯 나를 보았다.

 “아저씨, 1주일만 깎아주세요.”

 “너 돈 많이 버니까 벌금도 많이 내.”

 “그런 게 아닙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절 보더라도 기분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는 졌다는 듯 “1주일 약식기소”라고 서기에게 말했다. 난 3만5000원을 물고 나왔다. 그 사건은 처음엔 불미스러웠지만 나중엔 유쾌하게 끝났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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