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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기업가 정신도 글로벌 스탠더드 될 수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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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호 24면

Q.기업가 정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업에서 비전과 가치가 왜 중요한가요? 홈플러스의 핵심가치는 뭔가요? 기업이 핵심가치를 소홀히 하면 어떻게 되나요?

경영 구루와의 대화<9> 이승한 홈플러스그룹 회장①

A.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비즈니스를 영위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변화를 기회로 만들어 가는 정신, 특히 재무적 위험을 떠안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유독 한국의 기업가들은 옛날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조선시대의 거상 임상옥은 빈민 구제와 인재 중시를 몸소 실천했습니다. 장사, 즉 비즈니스는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사람을 버는 것이라고 했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내세운 경영 이념은 사업보국(事業報國)과 인재제일입니다. 상당히 흡사하지 않습니까?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도 기업은 이익이 우선이지만 기업 활동이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항상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삼성은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해 인류사회에 공헌해야 한다”고 신경영 선언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국의 기업가들은 유례없이 나라와 사람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바로 약 3년 전부터 서양을 중심으로 회자되고 있는 이른바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과 통합니다. 저는 전통적인 기업가 정신에 인재를 양성하고 국가와 인류에 공헌하는 자세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진화한 기업가 정신을 저는 ‘착한 기업가 정신’이라고 부릅니다. 착한 기업가 정신이란 ‘위험을 감수하고 끊임없이 도전해 변화를 기회로 만듦으로써 기업을 지속적으로 성장시키는 한편 국가와 인류의 더 나은 미래에 공헌하는 것’입니다.

이런 착한 기업가 정신이 저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 경제는 세계 10위권이고, 우리 기업이 만드는 세계 1위 제품이 135개나 됩니다. 기업가 정신뿐 아니라 한국이 원산지인 비즈니스 모델, 경영 이론, 경영 철학이 글로벌 스탠더드가 될 수 있습니다.

영국 테스코사와 합작법인 삼성테스코(홈플러스 운영사)를 설립한 후 2000년께 테스코 각국 현지법인 최고경영자(CEO)들과 콘퍼런스를 했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회사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면 브랜드의 시장 가치와 더불어,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브랜드의 사회적 가치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문화센터 운영 등 홈플러스가 벌일 지역사회 공헌 활동과 환경 운동, 환경 운동을 펼칠 환경 캐릭터(‘e파란’) 이야기도 꺼냈습니다. 그런데 당시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비즈니스나 신경 쓰지 엉뚱하게 무슨 환경 운동이냐” “캐릭터라니 우리가 무슨 디즈니랜드냐”는 소리도 들었죠. 그로부터 4~5년 후 현지법인의 경영성과를 평가하는 항목에 사회공헌 활동이 포함됐습니다. 각국에서 테스코 점포를 오픈하면서 지역사회를 위해 공헌하는 게 무엇이냐는 비판이 무성했기 때문입니다.

착한 기업가 정신이 지배하는 기업이 바로 착한 기업입니다. 착한 기업은 비전과 가치관이 남달라야 합니다. 비전이 중요한 까닭은 바로 기업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죠.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비전이란 조직이 희구하는 미래를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의 저자 짐 콜린스는 크고, 스릴 있고(hairy), 대담한 목표가 곧 비전이라고 주장했죠.

12년 전 홈플러스가 창립될 당시 국내에 이미 11개의 대형마트가 있었습니다. 선발업체 간의 경쟁이 치열한 이른바 레드오션이었죠. 그때 저는 정량적인 목표로 한국 시장 1위, 정성적인 목표로는 경영의 질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구성원들과 부단히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전략을 짰습니다. 그렇게 해서 원스톱 쇼핑과 원스톱 생활 서비스를 결합한 가치점이 탄생했습니다. 매출액이 가장 많은 1층에 문화센터, 어린이놀이터, 푸드코트, 민원센터 등 온통 돈 안 되는 생활 편의시설이 자리잡은 새로운 개념의 대형마트였죠.

당시 유통전문가들은 비웃었지만, “기존의 대형마트는 이것저것 물건은 많은데 쉴 만한 공간이 없어 외발 자전거를 타는 기분”이라는 어느 고객의 소리를 수용한 결정이었습니다. 가치점 1호인 안산점은 대박이 났고, 고객 가치를 중시한 가치점은 업계의 표준이 됐습니다. 만일 창립 당시 5년 후 8위쯤 하겠다고 목표를 세웠다면 지금의 홈플러스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이런 대담한 비전을 설정하려면 CEO가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통찰력의 바탕은 바로 경험과 지식이죠. 경험과 지식의 탄탄한 기초 없이 세운 비전은 공허할 뿐입니다. 가치점은 다시 3세대인 감성점, 4세대인 그린 스토어로 진화했습니다.

경영은 집을 짓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집을 제가 비전 하우스라고 명명했는데 비전은 이 집의 지붕에 해당합니다. 홈플러스의 비전은 세계 최고의 유통회사이자 2012년 국내 1위의 대형마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전이라는 지붕을 얹기 전에 먼저 지반을 다져야 합니다. 이때 파일을 박는데 이것이 바로 기업의 핵심 가치입니다. 홈플러스엔 고객, 직원, 협력회사, 지역사회, 국가, 주주 등 여섯 가지의 핵심 가치가 있습니다. 경영진이 의사 결정을 하거나 경영 활동을 할 때 반드시 따라야 할 가치죠. 이렇게 가치를 중시하는 경영이 바로 가치 중심의 경영입니다.

에비앙 생수로 유명한 프랑스의 다농그룹은 본래 비스킷 제조판매 회사였습니다. 경영권을 물려받은 이 회사의 2세 경영자가 회사의 핵심 가치를 “식품을 통해 인류의 건강에 기여한다”로 정했습니다. 그러자 ‘우리가 만드는 비스킷이 과연 고객의 건강에 좋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결국 핵심인 비스킷 사업 부문을 매각하고 유제품 사업을 재편하게 됩니다. 그 후 다농은 요구르트 등 유제품과 에비앙 생수 사업에 주력해 이 분야 1위 기업에 올랐습니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는 30년 전 리콜을 실시한 세계 최고의 혁신 기업이었습니다. 당시 도요타의 핵심 가치는 고객의 안전이었죠. 그 후 도입한 독자적인 적시 생산 시스템(JIT · just in time)은 많은 찬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도요타의 경영진은 혁신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착각을 하게 됐습니다. 도덕적 해이에 빠져 리콜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졌죠. 한마디로 안전이라는 핵심 가치를 등한시하게 된 겁니다. 비용 절감으로 이익을 안겨준 JIT가 결국 리콜 사태를 부른 셈이죠. 기업이 고유한 핵심 가치를 외면하면 몰락의 길을 걷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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