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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병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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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기원전 480년. 스파르타의 중장보병 300명이 10만이 넘는 페르시아의 침략군과 테르미필레 협곡에서 맞서 싸운 이야기는 전설과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고전하던 페르시아군은 배신자를 통해 뒤로 돌아가는 샛길을 알아냈고, 결국 스파르타군을 앞뒤로 포위하고 화살을 퍼부어 전멸시켰다.

 이때 페르시아군의 ‘최종 병기’가 활이었던 반면, 스파르타군에는 궁수가 단 1명도 없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스파르타가 활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이보다 800년가량 앞선 시대를 그린 ‘일리어드’에서도 그리스 최고의 무장 아킬레스는 트로이의 파리스가 쏜 화살에 발뒤꿈치를 맞아 절명한다. 이 영향인지 기원전 5세기까지도 활은 ‘전사가 가져선 안 될 비겁한 무기’로 여겨졌다.

 반면 활을 ‘민중의 무기’로 정의한 사람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는 저서 『전쟁의 역사』에서 영국 고유의 장궁(longbow)을 기사들의 무기인 석궁(crossbow)에 대조되는 농민들의 무기라고 설명했다. 로빈 후드의 무기인 이 장궁은 몇 차례의 개량을 거쳐 14세기 유럽 전장을 휩쓴 영국군의 최종 병기가 된다.

 세월이 흐르면 병장기의 유행도 바뀌기 마련이지만 한국의 무기사(史)에서 활의 인기에는 시대 구분이 없었다. 고구려의 주몽,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 작제건, 조선 태조 이성계 등 3개 주요 왕조의 시조가 명궁이란 공통점이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궁사뿐만 아니라 활 제작 기술 역시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신라 문무왕 때 구진천(仇珍川)은 1000보를 날아가는 강궁의 제작자였다. 당 고종의 부름을 받았지만 중한 벌을 내리겠다는 협박에도 끝내 고유의 활 제조법을 유출시키지 않았다.

 병자호란을 무대로 한 사극 액션영화 ‘최종 병기 활’이 350만 관객을 동원하며 높은 완성도를 칭찬받고 있다. 오늘날에도 양궁 최강국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국인의 ‘활 DNA’를 생각하면 관객의 사랑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배경이 17세기 병자호란이라는 점은 좀 아쉽다. 이미 병자호란 때는 조선군의 방어체제가 성첩(城堞)과 화약무기 중심으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32년 몽골 침입 때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해 침략군을 되돌려 보낸 승장(僧將) 김윤후의 시대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송원섭 jTBC 편성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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