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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머리 속에 피어오르는 목련 꽃 한 송이

중앙일보

입력

내일 비가 올 확률이 90% 라는 일기 예보의 정확성은 내일이 와 봐야만 알 수 있다. 사실 예보가 정확한가 아닌가가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게 만약 일기예보가 문제가 된다면 그건 예보의 신빙성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내일 정말 비가 오려나?), 그 예보에 따라 내가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가 때문에 생긴다(우산을 가져가야 하나?). 선택은 늘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는 차라리 고민을 덜어준다. 단지 난 그걸 피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런 비를 향해 '이건 엘니뇨 때문이지'라고 자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맑은 하늘에 갑자기 개구리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린다면 이건 좀 다르다. 이 사건은 더 이상 기상 이변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건 피할 수 없는 뭔가를 의미하는 '사인sign'이 된다(묵시론적인 계시?). 이제 생각해보자. 이 두 사건의 차이는 뭘까?

개구리가 하늘에서 내리던 밤에 생긴일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매그놀리아〉는 병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진 인간 군상들을 제시하면서 '우연'에 과연 둔감할 수 있는가를 자문한다. 러닝 타임이 3시간을 족히 넘어가고, 하루 동안 12명의 인물들에게 벌어진 사건들을 대단히 빠른 속도의 커트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하지만 단순함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이 영화의 가장 거대한 줄기는 아버지와 자식간의 형벌과도 같은 고통, 죄사함, 화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들은 모두 자식들을 사실상 버린 속물들이거나 죄인들이고(암으로 죽어 가는 얼 파트리지와 지미 게이터, 꼬마 퀴즈왕의 아버지), 아들과 딸은 그런 아버지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었다(지미 게이터의 딸, 프랭크, 꼬마 퀴즈왕). 아버지들은 죽음에 직면하면서 점차 자식을 상처 입히고 버린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속죄라는 강박관념에 빠져들고, 자식들은 정신적인 패닉 상태에 빠져들고 분노한다. 이 혼란들을 수습하고 해결하는데 감독은 그러나 별다른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 그는 다만 관객들이 우연적인 사건이 빚어내는 다양한 공명 패턴들을 통해 알 수 없는 질서와 교훈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하나의 이미지나 사건들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본질적인 것은 각 사건들의 지속이고, 하나의 사건이 또 다른 사건들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패턴과 리듬이다. 혼란한 이야기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앤더슨은 알트만적인 방식으로 텔레비전을 사용한다. '퀴즈쇼' 프로그램은 하나의 사건(진행자의 쓰러짐과 꼬마 퀴즈왕의 분노)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는 각기 다양한 인물들을 연결짓는 '가교'가 된다(그들은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텔레비전을 통해 서로 멀리 떨어져서tele 보기vision 때문에 하여튼 연결된다). 또 한편으로 음악은 연결의 패턴에 더 한층 리듬을 부여한다. 영화의 초반부 12명의 인물들은 하나의 동일한 주제곡으로 연결되고, 심지어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한 노래를 각 인물들이 한 소절씩 따라한다.

영화의 아름다운 근심, 매그놀리아라는 영화의 이마쥬

결국 앤더슨은 영화 예술의 가장 아름다운 근심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사건들을 어떻게 자르고 붙이고 연결시킬 것인가, 다시 말해서 몽타쥬에 대한 새로운 근심과 애착. 우연적인 사건(현실)이 얼마만큼 극적인가(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그는 자신의 영화를 극장 스크린에만 상영하지 않는다.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은 차라리 관객의 두뇌에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다. 그는 서로 분리되어 포개져 있는 목련 꽃잎(개개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우리의 두뇌안에서 한 송이 목련꽃(매그놀리아)으로 피어오르게 하려는 욕망을 표현한다. 결국 매그놀리아는 앤더슨이 생각하는 영화의 이마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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