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아름다웠던 여름 이야기]“돈노밧, 발로바시, 코레아!” … 다카의 아이들이 웃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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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폭우로 그 어느 해보다 지쳤던 올 여름, 손꼽아 기다려온 휴가를 정말 ‘뜨겁게’ 보낸 이들이 있다. 몇 년 동안 후원해온 결연아동을 만나기 위해 한국보다 더 후텁지근한 방글라데시로 떠나 일주일을 보낸 사람들과, 망치와 못 등을 챙겨 들고 8박9일 간 전국일주를 한 ‘집수리 봉사단’, 고국의 산간오지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겠다며 태평양을 건너온 재미교포 학생들, 그리고 지역아동센터의 아이들을 위해 특별한 공연을 준비한 대학생 봉사자들까지―. 다른 어떤 휴가 때보다 더 강력하게 재충전이 됐다는 이들의 특별한 휴가 이야기를 들어보자.

지난달 26일 방글라데시 가타일학교에서는 개교 이래 첫 운동회가 열렸다. 예체능 수업이 전혀 없다는 이곳 아이들을 위해 굿네이버스 후원자들이 준비한 것이다. 줄다리기, 밀가루사탕먹기 등 한국식 게임이 진행됐다. [사진=굿네이버스 제공]

세계적인 규모와 서비스를 자랑한다는 인천국제공항에도 그곳에 가는 직항 노선은 없었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라는 방글라데시. 지난달 24일 오전 9시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일행은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18시간의 여정 끝에 현지 시각으로 24일 자정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 도착했다. 국제구호개발 NGO인 굿네이버스를 통해 해외의 빈곤아동과 1:1 결연을 하고 도움을 줘온 후원자 20명과, 10년 전 자신들의 첫 해외구호활동이 시작된 지역을 찾아가보려는 굿네이버스의 직원 5명이었다. 그곳의 후원 아동들을 만나보고 현지에서 봉사활동도 하기 위해 떠난 길이었다. 여름휴가 필수품인 수영복 대신 목장갑과 모기장을 챙겨온 유영민(28·경기도 파주시·회사원)씨는 “18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들여가며 황금휴가를 이렇게 보내느냐고 주변에서 말렸지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충분히 각오하고 떠난 길이었지만, 후원자들은 처음 마주한 방글라데시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김명신(55·경기도 의정부·주부)씨는 “우리가 탄 버스에 아이를 안고 구걸하러 온 젊은 엄마의 모습에 울컥 속이 상했다. 내가 40년 전 초등학교 다닐 때 알던 방글라데시와 어쩜 그렇게 달라진 게 없는지 안타까왔다”며 착잡했던 첫 인상을 전했다.

#1 도화지 가득 펼친 9세 소녀 타라의 꿈

7월 25일 다카의 빈민주거지역 밀뿔. 뽈로비학교에서 만난 타라(9·여)는 한국에서 온 ‘시스터’들과 함께하는 미술수업에 누구보다 신이 났다. 타라는 방글라데시 정부가 주최하는 미술대회에서 1등을 했을 정도로 그림 실력이 좋다. 하지만 일용직 노동자 아빠의 소득으로 9명의 가족이 생계를 이어가는 터라 이제껏 크레파스나 색연필을 가져본 적이 없다. 후원자들은 타라처럼 안타까운 환경에 처한 뽈로비학교 아이들을 위해 한국에서 두 달 동안 수업 준비를 했다. 방글라데시 정규교과에는 예체능과목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원자들은 일부러 음악과 미술수업을 택했다.

“아므라 쇼바이 엑숑게 핫딸리(우리 모두 다 함께 손뼉을)~ 짝짝~”. 냉방도 되지 않는 작은 교실에서 서투른 벵갈어로 한국동요를 가르쳐주던 이창대(16·경남 김해시·경원고 1)군은 금세 땀범벅이 됐다. 이번 여행의 최연소 참가자인 이군은 “우리나라 애들 같으면 시시하다고 할 텐데 아이들이 너무 열심히 호응해줘서 오히려 고마웠어요”라고 말했다. 후원자들과 아이들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자신의 장래희망을 적는 희망사과만들기, 리듬악기수업 등을 4시간 동안 이어갔다.

 우리나라로 치면 유치부와 초등교육을 담당하는 뽈로비학교는 한국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세워졌다. 이 학교의 하멜 니바 교장은 “오늘 만남을 통해 한국의 후원자들이 매달 우리에게 보내주는 돈의 의미를 잘 알고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2 “공부시키는 걸 포기하지 마세요”

같은 날 오후 다카의 슬럼가 공동주택. 이민정(37·경기도 성남시·회사원)씨는 2008년부터 결연후원해온 에티(4·여)와 만날 생각에 설레는 가슴을 안고 골목길에 들어섰다. 쓰레기 가득한 길가에선 쾌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곰팡이 핀 침대 하나가 세간살이의 전부인 6.6㎡(2평) 남짓한 방이 에티네 네 식구가 사는 집이었다. 에티의 아빠는 밴가리(짐이나 사람을 옮기는 인력거) 운전사다. 처음엔 낯선사람들의 방문에 놀라 울음을 터뜨리던 에티는 이씨가 다정한 인사를 건네며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을 꺼내자 금세 환해졌다. “코리아테케 에세체(한국에서 날 보러왔어요)”라며 구경나온 동네사람들에게 자랑도 했다. 이씨는 에티의 부모에게 “계속 후원을 할 테니 아무리 힘들어도 공부시키는 걸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이번 여행에서 이씨 외에도 박선희(37·여·경기도 부천시·회사원)씨, 최영락(38·충북 청주시·의사)씨, 그리고 아버지 이장오(45·경남 김해시·자영업)씨와 함께 온 창대 군이 자신들의 후원아동을 직접 만났다.

결연아동이 사는 곳을 직접 방문한 후원자들이 동네아이들에게 한국어로 페이스페인팅을 해주고 있다.

#3 오늘은 가타일학교의 첫 운동회 날

26일 다카에서 북쪽으로 107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가타일학교에서는 개교 이래 첫 운동회가 열렸다. 가타일은 인구의 30%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농촌지역으로, 전교생 928명이 모두 한국 후원자와 결연해 후원을 받고 있다.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사우나 같은 날씨였지만 맨발의 아이들은 밀가루사탕먹기, 줄다리기 등 5시간 동안의 한국식 운동회를 맘껏 즐겼다.

3학년 사비아(10·여)와 미사드(10·여)는 “맨날맨날 한국사람들이 와서 놀아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석민선(28·여·경남 창원시)씨는 “학원강사라는 직업 때문에 경쟁의 한가운데 있는 아이들만 만나다보니 한국에서는 웃을 일이 많지 않았는데 이곳에서는 아이들 때문에 실컷 웃고 있다”고 말했다.

운동회가 끝나고 시라즈간즈로 이동한 일행은 남은 일정 동안 굿네이버스의 현지 사업장을 둘러보고 화장실 만들어주기 등의 봉사활동을 했다. 굿네이버스의 이승형 방글라데시 지부장은 “이런 해외사업장 방문을 통해 후원자들은 자신들이 기부한 돈이 어떻게 아이들과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는지 볼 수 있고, 해외지부는 더욱 투명하고 전문성 있게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고 말했다. 방글라데시는 굿네이버스가 최초로 해외지부를 설립한 나라로, 굿네이버스의 25개 해외사업 국가 중 가장 많은 아동들을 결연후원 하고 있는 곳이다. 2011년 8월 현재 1만600여명의 아동이 한국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 에필로그

후원자들은 6박7일의 특별한 휴가를 마치고 7월 30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지난 20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의 한 까페에 다시 모였다. 그동안 최영락씨는 후원아동을 6명으로 늘렸고, 석민선씨는 후원아동에게 첫 편지를 보냈다. 민지선(24·여·경기도 남양주시·교사)씨는 다른 후원자들과 아이들의 편지교환을 돕기 위해 굿네이버스 단기번역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조윤정(27·서울 영등포구·방송디자이너)씨는 “스타벅스 커피 6잔만 안 마시면 내가 후원하는 아이가 의사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평소대로 휴가를 보냈으면 뻔했을 텐데 방글라데시에서 보낸 일주일은 강렬한 재충전의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20명의 후원자들은 앞으로 매월 넷째주 토요일마다 함께 모여 자원봉사를 하기로 했다.

다카(방글라데시)=손지은 행복동행 기자
후원문의=굿네이버스 1599-0300 www.gni.kr

지난달 26일 방글라데시 가타일학교에서는 개교 이래 첫 운동회가 열렸다. 예체능 수업이 전혀 없다는 이곳 아이들을 위해 굿네이버스 후원자들이 준비한 것이다. 줄다리기, 밀가루사탕먹기 등 한국식 게임이 진행됐다. [사진=굿네이버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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