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셋방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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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타향살이를 교거(僑居)라고 한다. 고려 말의 문인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안조마(安照磨)의 요양(遼陽) 부임을 전송하는 시’에서 “그대 지금 홀연히 멀리 떠나지만/나 역시 타향살이 습관이 되었소(君今忽遠適/我亦慣僑居)”라고 읊었다. 교거는 곁방살이, 즉 셋방살이를 뜻하기도 한다. 양반 사대부의 셋방살이는 대부분 벼슬살이 아니면 귀양살이이기 때문이었다. 귀양살이보다야 낫지만 가족과 떨어진 벼슬살이도 힘들기 마련이었다.

 조선 중기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제야의 일을 적다(除夜書事)’는 시에서 “일곱 번 관직 옮겼지만 모두 자리 비웠고/이 동네 저 동네 옮겨봐도 셋방살이는 마찬가지네(七命徙官皆曠職/兩坊遷宅亦僑居)”라고 노래했다. 선조 때 유희춘(柳希春)이 『미암일기(眉巖日記)』에서 ‘포육(脯肉) 한 조각과 말린 꿩’, 쌀과 반찬거리 등을 집주인에게 주었다고 쓰고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는 쌀과 부식 등이 집세였다. 호화 셋집도 있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한성부(漢城府)’조에 종친이나 공주·옹주집에서 세를 주는 ‘금교세가(金轎貰家)’가 있는데, “혼인하는 신부의 집에서 쓴다”고 설명한 것으로 봐서 혼인식장으로 추측된다.

 셋방은 도시일수록 비싸고 서울이 가장 비싸다. 서울 셋방살이를 계옥지지(桂玉之地), 줄여서 계옥(桂玉)이라고 한다. 전국시대 소진(蘇秦)이 초(楚)나라에 간 지 3일 만에 위왕(威王)을 만나고 바로 떠나려 하자 왜 급히 떠나려 하느냐고 물었다. 소진이 “초나라는 밥이 옥(玉)보다 귀하고, 땔나무는 계수나무(桂)보다 귀합니다”라고 답한 데서 나온 말로서 『전국책(戰國策)』 ‘초위왕(楚威王)’조에 나온다. 서울에서는 옥으로 밥을 지어 먹고 계수나무로 땔감을 할 정도로 물가가 비싸다는 ‘식옥취계(食玉炊桂)’란 말도 있다.

 가을 이사철이 다가오자 오른 전셋값을 걱정하는 지인들이 늘었다. 정부에서는 임대사업자에 대한 세제 혜택 확대책을 내놓았지만 공급 확대책과 전·월세 가격 안정대책이 빠진 절름발이 대책이란 비판이 높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19일 ‘자유신문’은 ‘서울 차가인(借家人 : 셋방 사는 사람)동맹’에서 “일본인 주택을 혁명가와 전재(戰災) 동포, 셋방 사는 사람에게 분배. 주택 이중 소유 몰수. 집세 인상 절대 반대” 등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치솟는 전세가와 정부 대책에 실망한 집 없는 서민들이 차가인동맹이라도 다시 만들어 자구책을 마련해야 하는지, 가을바람이 분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