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검증무대된 파리 TV 토크쇼

중앙일보

입력

최근 프랑스 TV의 토크쇼에 정치인들이 단골 손님으로 등장한다. 좌파건 우파건, 국회의원이건 장관이건, 남성이든 여성이든 앞다퉈 브라운관에 얼굴을 내민다.

이들은 정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게 아니다. 1980년대 프랑스 TV를 풍미하던 본격 시사 토론 프로그램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대신 한담이나 신변잡기 위주의 오락 토크쇼가 그 자리를 대신했는데 프랑스 정치인들은 거기에 나가지 못해 안달이다.

요즘 프랑스에서 인기있는 토크쇼 프로그램은 미셸 드리케의 '빨리 일요일이 됐으면' 과 티에리 아르디송의 '누구나 ' , 칼 제로의 '진짜 뉴스' 등이다.

이중 드리케의 토크쇼는 그나마 점잖은 편이지만 나머지는 거친 표현과 반말, 조심성없는 질문들이 난무한다.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야당인 공화국우파연합(RPR)의 파리시장 후보 지명전 도전을 선언한 에두아르 발라뒤르 전 총리(71)는 최근 '누구나 그걸 이야기한다' 에 출연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과거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탈락했을 때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느냐" "왜 (터키 이민 2세라는)출신을 말하기 꺼리느냐" 는 등의 거친 질문들이 마구 터져나온 것.

그런 봉변을 당했지만 발라뒤르 전 총리가 출연한 '누구나…' 은 무려 2백50만명 가까이 시청한 것으로 조사됐다. 위험부담은 있지만 정치인들로선 유권자들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시청률이 높다 보니 마르틴 오브리(50.노동), 엘리자베스 기구(54.법무), 자크 랑(61.문화)등 현직 장관들도 오락 토크쇼에 자주 출연해 사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공화국우파연합의 또 다른 파리시장 후보 프랑수아즈 드파나피외(52)전 관광장관은 토크쇼에서 가죽 점퍼 차림에 펑크 스타일로 기타를 연주하는 쇼맨십도 발휘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오락 토크쇼는 갖가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바꿔놓는 데 기여한다는 평가도 받는다.

활발한 정책 토론은 아니더라도 사적인 대화로 정치인 개인의 삶의 여러가지 단면들을 조명하다 보면 인간적인 됨됨이 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이 정치인을 판단할 근거도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는 요즘 프랑스 국민들이 정치인들의 인간적 면모를 보다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어쨌든 프랑스 정치인들이 평소 TV에 자주 나와 인생검증을 받는 것은 병역미필과 탈세.전과 등이 뒤늦게 드러나 법석을 떠는 한국 정치판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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