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 “흑백이 함께 사는 무지개 나라” 레이건 “고르비, 이 벽을 무너뜨리시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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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지도자의 말에 철학과 비전이 담기는 게 ‘명연설’이다. 시대정신을 읽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해 국내외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설은 거꾸로 지도자의 능력을 판단하는 가늠자도 된다.
1994년 5월 세계의 이목은 남아공 대통령 취임식 연설에 쏠렸다. 인종차별 정책에 맞서다 27년을 복역한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돼 처음 입을 여는 자리다. 만델라는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 왔다”며 “흑과 백이 모두 자부심을 느끼는 나라, 무지개 국가(rainbow nation)”를 선언했다. 사회 통합을 남아공의 비전으로 제시해 감동을 줬다.

87년 6월 베를린 장벽 앞에 선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 문을 여십시오! 이 벽을 무너뜨리시오(Mr. Gorbachev, open this gate! 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라는 명언을 남겼다. 당초 백악관의 판단은 “언젠간 이 벽이 허물어질 것이다” 정도의 문장이었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이를 명쾌한 단어로 바꿨다. ‘이 벽을 무너뜨리시오’란 영어 네 단어는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됐다. 그로부터 1년여 뒤인 88년 12월 당사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미국 뉴욕의 유엔총회장에 섰다. 과감한 개혁·개방 정책을 주도했던 그는 유엔총회 연설에서 “선택의 자유는 (인류) 보편의 원칙”이란 말로 소비에트의 개혁과 민주화를 추진하는 자신의 입장을 선명하게 밝혔다. 그러면서 “무력과 위협이 더 이상 대외 정책의 도구가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냉전 종식에 대한 국제적 선언이었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61년 12월 유엔총회에서 “인류가 전쟁을 끝내지 않는다면 전쟁이 인류를 끝낼 것”이라는 말로 군축의 시급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1년 반 뒤인 63년 8월 미국과 소련은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PTBT)을 체결한다.

대통령의 말은 위기 극복의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대공황으로 바닥 모를 경기 침체와 실업의 고통을 겪던 미국민에게 33년 3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꺼낸 첫 일성(취임식 연설)은 자신감의 회복이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할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란 명문을 남겼다.

민심을 읽지 못한 ‘말’로 평가절하되는 경우도 있다. 이상철 성균관대 교수(스피치학)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79년 7월 경제 위기를 강조하며 도덕적 위기까지 거론했지만 오히려 여론의 반발만 불렀다. 미국 학자들은 이를 실패한 연설의 대표 사례로 꼽는다”고 지적했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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