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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중앙일보

입력

환경적 요인에 의해 유전적 특이성이 발현하므로 따로따로 생각할 수 없어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면 대개 처칠·간디·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제임스 왓슨·프란시스 크릭을 꼽는다. 왓슨과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함으로써 유전자의 분자생물학적 이해에 대한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후 시대를 지배해온 획기적인 과학의 위업이다. 이제 인간 게놈의 염기서열이 거의 밝혀져감에 따라 그들이 불붙인 과학 혁명이 드디어 대단원에 이르게 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런 전망에는 상당한 불안감도 따른다. 그것이 하나의 획기적인 이정표가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의 섬뜩한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에서처럼 인간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사고·감정이 유전자의 총체에 불과하며 과학자들은 유전자 지도를 이용해 그 총체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게 될 날이 과연 올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이며 인간이 소중하게 생각해온 개성과 자유의지는 어떻게 될까.

그런 불안의 핵심에는 ‘유전자 제일주의’(Primacy of Genes)라는 개념이 있다. 왜 어떤 새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며, 왜 특정한 사람이 정신분열증에 걸리는가 등 복잡한 생물학적 문제를 설명하려 들 때 그에 대한 대답이 그런 현상을 초래하는 기본 구성요소를 이해하는 데서 찾아질 수 있으며 그 기본적 구성요소가 궁극적으로 유전자라고 믿는 것이 ‘유전자 제일주의’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어떤 행동을 ‘일으키거나 통제하는’ 것은 유전자다. 한 유전자의 잘못된 형태를 가지면 끔찍한 운명을 피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수태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가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유전자와 환경은 서로 영향을 미치며 환경은 유전자의 역할을 강화하거나 억제한다. 예를 들어 ‘정신분열증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것은 이 병에 걸릴 확률이 50%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질병은 정신분열증에 취약한 유전자와 정신분열증을 유발하는 환경이 한데 합쳐질 때만 나타난다.

또 ‘유전자 제일주의’는 유전자가 독자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유전자가 특정 단백질 합성의 시기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유전자를 자율적인 개체로 본다면 그 대답은 유전자가 누구의 지시를 받는 게 아니라 자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 DNA의 염기서열에서 실제로 유전자를 구성하고 단백질 합성을 지시하는 코드 역할을 하는 것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염기서열의 95% 이상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그것들은 대부분 유전자 활동을 조절하는 스위치의 제어장치를 구성할 뿐이다. 예를 들어 1백 쪽짜리 책이 있다면 95쪽은 나머지 5쪽을 읽는 데 필요한 지침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유전자는 단백질 합성 시기를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스위치를 제어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같은 세포 속의 다른 부분에서 나오는 화학적 전달체인 경우도 있고 신체의 다른 세포에서 나오는 전달체인 경우도 있다. 또 유전자가 환경 요인에 의해 발현되는 경우도 있다. 몇 가지 발암물질은 세포에 파고들어가 DNA 스위치 하나와 합쳐져 암을 형성하는 유전자를 발현시킨다. 또 어미쥐는 새끼를 핥아 털을 깨끗하게 정돈해줌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새끼의 성장과 관련된 유전자를 일깨운다.

영장류의 경우 발정기의 암컷 냄새는 일부 수컷의 생식 제어 유전자를 활성화시킨다. 대학생의 경우 기말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가 면역체계를 억누르는 유전자를 발현시켜 독감이나 더 심한 질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환경은 유전자의 발현 또는 억제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환경을 유전자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 또 유전자는 단백질 합성으로 환경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유전자의 역할을 환경과 분리할 수도 없다. 물론 유전학이 의학에서 사회학에 이르는 모든 분야를 아우를 수 있을 만큼 포괄적이지는 못하다. 그러나 유전자에 대한 지식이 깊어질수록 환경의 중요성도 더 깊이 인식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실 생활에서도 유전자는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니다.

[필자는 스탠퍼드大 생물과학 및 신경학 교수이며 ‘얼룩말에는 왜 궤양이 없는가: 스트레스와 관련 질병 및 극복방법에 관한 안내서’(Why Zebras Don''t Get Ulcers: A Guide to Stress, Stress-Related Disease and Coping)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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