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에서 정신병까지 발병 전에 잡아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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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게놈 해독은 의학에 혁명을 불러올 것. 유전자를 보고 건강에 위험한 요인 가려내 많은 잠재 질병들을 미리 치료할 수 있게 된다. 유전자 치료법이 임상적으로 널리 쓰이려면 앞으로 최소 10년은 걸릴 것이라는 전문가의 전망. 적용범위는 종양·전염성 질환에까지 확산되고 있다.

앤 미스코이는 지난날 아버지와 삼촌이 40대 중반에 장기(臟器) 이상으로 사망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지난해 50세를 넘기자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신체기능이 시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관절이 쑤시고 머리카락이 빠졌으며 늘 심한 피로감에 시달렸다. 혈액검사 결과 철분 함량이 지나칠 정도로 높게 나왔지만 의사는 큰 문제는 없다고 안심시켰다. 그러나 미스코이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그녀는 혈액·세포·장기에 철분이 위험한 수준으로 과잉 침착되는 혈색증(血色症)이라는 유전성 질환을 발견했다.

혈색증은 미국에서 가장 흔한 유전성 질환이며 아마도 오진율이 가장 높은 질환일 것이다. 혈색증에 관한 설명은 모든 것이 그녀의 경우와 들어맞았다. 증상과 혈액검사 결과는 물론 심지어 친척들의 요절도 이해가 됐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고민을 좀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줄 의사를 찾았다.

최근까지도 이 질환을 진단하기 위해선 肝 조직검사가 필요했으며 그건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스코이는 그런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었다. 과학자들이 몇 년 전 혈색증 유전자를 분리해냈고 피 한방울로 질환 유무를 알아낼 수 있는 검사법을 개발한 것이다. 미스코이는 양성으로 나타났고 그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매주 한차례 혈액을 빼냄으로써 장기에 영구적 손상이 오기 전 철분 함량을 줄일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증세가 사라졌다. 몇 달 간격으로 방혈을 계속하는 한 남들 만큼 살 것이다. “DNA 검사가 없었다면 내 몸에 문제가 있다는 걸 의사에게 납득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혈색증 검사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례는 이제 막바지에 이른 인간 게놈 해독 작업이 가져올 변화의 1차 예고편에 불과하다. 美 휴먼게놈연구소(NHGRI)의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는 2010년께는 스크리닝 테스트를 통해 개인의 독특한 건강 위험요인을 측정하는 것은 물론 담배나 치즈버거에 대한 저항력까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유전적 발견들로 인해 질병의 증세보다 원인에 초점을 맞춘 신약이 쏟아져 나오고, 의사는 환자의 유전적 특성에 따라 같은 질병에도 다른 치료법을 처방할 것이다. 유전자의 약제화는 아직 먼 이야기지만 콜린스는 그것도 몇십 년 내에 일반화되리라고 본다. “2050년이면 많은 잠재 질병의 병원(病原)이 발병 전 분자 수준에 불과할 때 치료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지나친 낙관일지도 모르지만 콜린스가 내다본 것들은 이미 진행중이다. 현재 미국의 임상 연구소들은 매년 약 4백만 건의 유전자 검사를 실시한다. 신생아들은 보통 겸상적혈구성 빈혈, 선천성 갑상선 질환, 페닐케톤 요증, 정신 지체의 원인이 되는 신진대사 이상 등을 검사받는다. 이 질병들은 혈색증과 마찬가지로 발견되지 않으면 치명적이지만 초기에 발견하면 치료 가능성이 높다.

암 발생률이 높은 집안의 일원이 암을 유발하는 돌연변이를 물려받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새 검사법도 나왔다.“우리 어머니는 47세에 결장암으로 돌아가셨다”고 존스 홉킨스 의대의 종양학자 버트 보겔스타인은 말했다. “어머니가 유전적으로 암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걸 알았다면 조기 검사로 치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조기 발견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유전자는 우리가 병에 걸렸는지를 판단하게 해줄 뿐 아니라 다양한 치료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알려준다. “과거의 처방 기준은 나이와 체중뿐이었다”고 聖주드 어린이 병원(테네시州 멤피스)의 윌리엄스 에번스 박사는 말했다. 지금은 유전적 발견 덕분에 의사들이 때론 특정약품이 어떤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 어떤 환자에게 해가 되는지 판단할 수 있다.

聖주드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화학요법이나 골수이식에 들어가기 전 어린 환자들 백혈병 세포의 공격성을 측정한다. 그리고 화학요법에 적당하다고 판명된 어린 환자는 내성(耐性)을 측정하기 위해 별도의 유전자 검사를 받는다. 대다수 환자는 급성백혈병 치료제 머캅토퓨린의 기준 용량을 복용해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10명 중 1명은 이의 대사(代謝)에 필요한 효소를 충분히 생산하지 못하며, 이들에겐 표준 처방 용량이 지나치게 높아 독이 될 수도 있다.

효과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암 치료제만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어떤 약이든 복용자의 10∼40%는 기대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결과 매년 2백만 명의 미국인이 부작용으로 병원에 입원하며 10만 명이 사망한다. 현재는 소수의 병원들만이 약물치료에 유전자 검사를 이용하고 있으나 약리유전학이라는 이 방법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천식·당뇨·심장질환·편두통 치료에 대한 반응을 예측하는 법을 찾아내고 있다. 인사이트 제노믹스社 같은 회사들은 한 번에 수천 개의 유전자를 분석하는 칩을 개발하고 있다. “나의 꿈은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 유전자 분석을 받는 것”이라고 시카고大의 마크 라테인 박사는 말했다. “부모들은 자식의 유전자를 해독한 CD롬을 갖게 되며 의사들은 약을 처방할 때 그것을 사용해 최선의 치료법을 찾아낼 것이다.”

불행히도 아는 것이 항상 힘이 되는 건 아니다. 누구든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다든가 특정약품에 민감하다는 걸 알면 자신을 미리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가족이 헌팅턴 무도병이나 조기 발병 알츠하이머병에 시달려 왔다고 가정해보자. “양성반응이 나와도 아무 대책이 없다”고 컬럼비아大의 신경심리학자 낸시 웩슬러는 말했다. “언제 발병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에서 헤어날 수도 없다.”

우리의 바람은 물론 유전과학을 이용해 건강문제를 미리 발견할 뿐 아니라 완치하는 것이다. 20년간의 연구 끝에 유전자에 기초한 치료법 겨우 몇 가지가 임상에 쓰이게 됐다. 그러나 유전과학은 이제 종양학에서 전염성 질환에 이르는 모든 분야의 치료법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무한한 가능성을 열고 있다.

전통적 유전자 치료법은 그럴 듯한 간단한 아이디어에 기초한다. 유전자가 인체 내 모든 세포의 조합을 결정하므로 환자에게 교정(矯正) 유전자를 투입하면 만성질환을 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유용한 DNA 가닥을 분리해 세포를 통과할 수 있는 운반체 또는 ‘벡터’(매개체)로 꼬아 넣는 기술을 익혔다.

그러나 인체가 이를 받아들여 치료 유전자가 효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이 난제였다. 유전적으로 변형된 감기 바이러스인 아데노바이러스 같은 가장 흔한 벡터는 필요한 유전자를 파괴하고 환자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면역 반응을 촉발한다. 유전자 치료 실험에 자원한 펜실베이니아大의 환자 제시 겔싱어가 지난해 아데노바이러스의 부작용으로 사망하자 몇몇 전문가들은 실험 중지를 주장했다.

새 벡터가 나와도 유전자 치료법이 임상적으로 널리 쓰이려면 최소 10년은 걸릴 것이다. 그러나 좀더 간단하게 DNA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예컨대 메릴랜드州의 휴먼 게놈 사이언시즈社 연구자들은 인간의 유전자를 배양 가능한 박테리아 세포에 꼬아 넣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세포들은 환자에게 약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단백질을 대량 생산한다. 이 회사 제품 MPIF-1은 화학치료의 독성으로부터 골수세포를 지켜준다. KGF-2라는 또다른 단백질은 상처를 더 빨리 아물게 할 수 있다. 이 약들은 아직 임상시험 초기 단계지만 종양학자들은 화학요법으로 죽어버린 면역 세포를 보충하는 데 이미 비슷한 약제를 쓰고 있다.

유용한 유전자의 이용법에 매달리는 팀이 있는가 하면 해로운 유전자를 잡아내는 데 진력하는 팀도 있다. 알다시피 유전자는 염색체를 이루는 길다란 2중 나선의 DNA 중 단백질 정보(유전정보)를 갖고 있는 부분이다. DNA에서 단백질 합성의 매개체가 되는 m-RNA가 전사(轉寫)된다. m-RNA 전사는 ‘프로모터’라는 DNA 부위에 ‘전사 인자’라는 RNA 합성 효소가 결합하면서 시작한다. 전사 인자는 DNA 가닥을 따라 움직이며 m-RNA 분자를 합성한다. 과학자들은 가짜 프로모터를 세포에 대량으로 집어 넣었을 때 전사 인자가 실제 유전자가 아닌 곳에 결합하며 RNA 합성이 중단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기술은 아직 임상에 쓰이는 단계는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 같다.

설령 유전자의 RNA 생성을 막지 못하더라도 RNA가 해로운 단백질을 생산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간혹 가능하다. 요령은 RNA의 서열 일부를 가로막는 미세한 ‘항과민’ 분자로 RNA에 공세를 퍼붓는 것이다. 그런 작전이 안 통하면 아예 단백질 자체에 맞설 수도 있다. HER-2의 경우를 보자. 이는 유방 세포의 표면에 흩어져 있으며 성장신호를 흡수하게 해주는 수용기 단백질이다.

대다수 여성은 HER-2를 생산하는 유전자에 대해 2개의 복사본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유방암 중기 이상 환자들의 약 3분의 1은 17번 염색체에 흩어져 있는 유전자의 복사본을 더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세포는 일반적 성장신호 수용기의 1백 배를 갖고 있는데, 이런 세포가 악성으로 드러나면 문제가 된다.

그것이 5년 전 진저 엠피(50)의 문제였다. 그녀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이미 암이 임파절과 간에까지 퍼져 있어 기존 치료법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캘리포니아大(UCLA)로 전화를 걸어 임상시험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 마침 데니스 슬래먼 박사는 HER-2 수용기를 차단하는, 유전공학으로 만들어진 ‘허셉틴’이라는 항체를 시험 중이었다.

엠피의 세포에 변형 단백질이 우글거리는 테스트 결과가 나오자 그녀는 임상시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녀의 종양이 다음해에 무려 25%나 줄자 연구자들은 치료를 계속했다. 3년 반 동안 매주 주사요법을 실시한 결과 마침내 종양이 사라졌다. “병변(病變)이 너무 작아 의사들도 그게 암 세포인지, 반흔 조직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허셉틴은 이제 시장에 나왔고 연구자들은 현재 초기 환자를 대상으로 치료효과를 연구하고 있다. 이 약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러나 이 약은 게놈의 이해가 의술 발달을 얼마나 앞당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대형무기의 개발 대신 특정 문제를 겨냥한 초정밀 무기를 개발해냈다”고 슬래먼은 말했다. 그 전략이 확산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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