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 쫓아낸다고 없어지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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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호 31면

지하철 서울역에서 지상 기차역 건물 2층까지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 공간 주변은 서울역 ‘하드 코어’ 노숙자들의 근거지다. 5~6명의 노숙인이 여기저기 모여 막걸리와 소주로 술판을 벌인다. 그 옆에는 이미 대취했는지 웃통을 벗어젖히고 드러누운 사람도, 고성을 지르며 싸움을 하는 이도 있다.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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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주변은 노숙인을 위한 최소한의 인프라를 모두 갖춘 몇 안 되는 곳이다. ‘식(食)’은 각종 종교·사회단체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센터 5~6곳에서, ‘주(住)’는 서울역사 안이나 지하철역 통로 등에서 해결할 수 있다. 물론 노숙인 쉼터도 있다. ‘간식’도 어느 정도 해결 가능하다. 서울역을 오가는 수많은 시민에게 ‘요청’하면 소주·담뱃값 마련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난해 초 경희대 대학원생 김준호씨가 70일 동안 서울역 노숙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조사한 것을 토대로 쓴 논문에는 이 같은 노숙인들의 생활상이 세밀하게 담겨 있다.

이런 노숙인들을 상대로 코레일이 칼을 빼들었다. 22일부터 오후 11시 이후 서울역사 내 노숙행위를 전면 금지하겠다고 한다. 언뜻 ‘서울역에서 노숙인이 모두 사라진다’로 들리지만, 그건 아니다. 열차표를 사고 열차를 기다리는 기차역 내부 공간에서 밤잠을 자는 것을 막겠다는 거다. 역시 코레일 관할 지역이긴 하지만 서울역 광장은 단속 대상이 아니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노숙인을 밤에 역사 밖으로 내몬들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심야에 역사 밖으로 내몰린 노숙인들은 광장 아래 지하공간으로 ‘위치 이동’할 뿐이다. 낮엔 또 어쩔 건가?
코레일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노숙인 문제로 쏟아지는 민원도 신경 써야 한다. 지난해 말부터 공항철도가 운영되면서 외국인들이 서울역으로 쏟아지고 있다. 하루 평균 공항철도 이용객 10만 명 중 3만 명이 외국인이다. 그들은 술 취하고 지린내 나는 노숙인에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첫인상을 받게 된다.

물론 역사 주변 노숙인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주요 도시 철도역에도 노숙인이 적지 않다. 최근 취재차 다녀온 인도 뉴델리의 기차역은 노숙인과 인근 주민, 여행객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였다. 화장실이 없는 주변 마을 사람들이 아침이면 물병 하나 들고 철길로 나와 용변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후진국이든 선진국이든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역사 안팎에 퍼져 앉아 술판을 벌이는 사람은 없었다. 노숙인이 술 취해 서로 싸우고 방뇨하고, 여행객에게 시비를 거는 나라는 한국뿐 아닌가 싶다.

서울역 광장에서 농성 중인 ‘노숙인 강제퇴거 철회 공동대책위원회’ 간부를 만났다. 그들 역시 공공장소에서 술 마시고 방뇨하며 싸우는 노숙인들은 법을 만들어서라도 치료나 제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원 대상이 된 건 노숙인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행동방식이다. 그렇다면 뭔가 공적 차원의 대책이 나올 때가 됐다. 예컨대 서울역 한 구석에라도 노숙인용 샤워시설을 마련해 그들의 몸과 옷을 씻게 하고, 공공장소에서 음주·방뇨를 하지 못하게 하면 어떨까. 선을 그어 여기서 나가라고 해봤자 해결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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