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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벼랑 끝 대치가 미국 신용 갉아먹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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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호 03면

“미국의 신용등급을 낮춘 가장 큰 원인은 정치권의 벼랑 끝 대치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국가 신용등급 책임자인 존 체임버스 전무는 5일(현지시간) CNN과 인터뷰에 나섰다. 미국 신용등급을 최고 등급인 AAA에서 AA+로 한 단계 강등한다고 발표한 직후다. 그는 신용등급을 낮춘 가장 큰 요인으로 악화된 미국 정치 상황을 꼽았다. ‘정치적인 겁주기(Political brinkmanship·원하는 대로 유도하기 위해 상황을 아주 위험한 지경으로 몰고 가는 수법)’로 인해 부채한도 조정 협상이 큰 이슈로 번졌다는 것이다. 체임버스는 “1960년대 이후 별 논란 없이 60~70번이나 했던 것처럼 의회에서 적시에 부채한도를 조정했다면 신용등급 강등으로 이어진 많은 논란이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 정부에 대해서도 “현금 흐름에 문제가 생기는 마지막 날까지 손을 놓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미국 신용등급 사상 첫 강등 원인과 파장은

S&P의 역사는 18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헨리 바넘 푸어는 철도회사들의 재정과 운영 상태를 분석하는 미국의 철도와 운하라는 책을 냈다. 그는 아들과 함께 매년 이 정보를 갱신하기 위한 회사를 차렸다. 1906년 루터 리 블레이크는 철도 외의 회사를 분석하는 ‘스탠더드 통계사무소’를 차렸다. 두 회사는 1941년 합병해 가장 영향력 있는 신용평가업체인 S&P가 됐다. 41년 이후 미국은 늘 최고 등급인 AAA였다. 국가 신용등급은 국가가 발행한 채권의 부도 위험성을 알려 주는 지표다. 세계의 기축통화인 달러를 찍어 낼 수 있는 미국이 최고 등급을 받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였다. 급하면 달러를 찍으면 되니 미국은 부도가 불가능하다는 신화였다.

하지만 최근 부채한도 협상은 미국도 부도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줬다. 체임버스가 지적한 것처럼 미 의회의 대치는 투자자들에게 “미국 국채도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불안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이달 초 “미국은 세계 경제에서 기생충 같은 존재”라며 독설을 퍼부었다. 그는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디폴트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비꼬았다.

미국은 정치 못지않게 경제 상황도 좋지 않다. S&P는 신용등급 강등을 알리는 성명서에서 “의회와 미국 행정부가 합의한 재정건전화 계획이 미국 정부의 중기 부채 수준을 안정화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김주현 현대경제연구원장은 “미국발 금융위기로 전 세계에서 수많은 금융업체가 파산한 데다 올해 미국의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을 넘어섰다”며 “신용등급이 조정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체임버스도 “10년 안에 재정적자를 최소한 4조 달러는 줄여야 한다는 것이 S&P의 가이드라인이었는데 지난 2일 합의한 미국 중기 재정계획에서는 재정적자 감축 목표가 2조4000억 달러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번 AAA 등급을 잃으면 일반적으로 다시 올라가기 어렵다”며 “내려간 신용등급이 장기간 이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이날 세계 금융 시스템의 주춧돌이 흔들렸다고 평가했다.

‘금리 상승 소비 위축’ 악순환 우려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은 실물경제에도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난해 미국 정부는 국채 이자로 GDP의 2.7%인 4140억 달러를 썼다. JP모건체이스는 국가 신용등급이 한 단계 떨어지면 국채 수익률이 60~70bp(0.6~0.7%포인트) 오를 것으로 추정했다. 한 해 1000억 달러 정도의 이자가 더 든다는 계산이 나온다.

국채 금리만 오르는 것이 아니다. 주택담보대출·학자금대출·신용카드론 등이 대부분 국채 금리와 연동된다. 소비자의 이자 부담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만큼 내수 소비가 위축되고, 주가도 내려갈 가능성이 커진다. 기업이 고용을 줄이면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소비를 더욱 줄이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ABC방송에 따르면 워싱턴의 정치문제 연구소인 ‘서드웨이’는 금리가 0.5%포인트 오를 때마다 일자리 64만 개 이상이 사라질 수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일부에서는 실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국채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모건스탠리의 애널리스트 아르노 마레스는 “미국 신용등급이 떨어졌다고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를 처분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과거 일본·캐나다 등의 사례를 볼 때 최고 등급이던 국가의 신용등급이 강등돼도 투자자들이 즉각적으로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는 등의 과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S&P 등이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미국 신용등급 하락 가능성을 제기했기 때문에 이미 시장에 충분히 반영됐다는 평가도 있다. JP모건체이스는 “디폴트 사태 없이 신용등급만 내려간다면 국채 수익률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며 “따라서 금리 등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제한적인 수준에 그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박소연 한국투자증권 연구위원은 “2008년 금융위기 때는 100이던 금융채의 담보가치가 제로가 되는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미국 국채의 가치가 100에서 99나 98로 떨어지는 정도”라며 “단기적으로 금융시장에 교란이 발생할 수 있으나 주식 투매를 촉발하는 트리거(방아쇠)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해 유럽·일본 등은 미국 신용등급 하락의 후폭풍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이 경기 침체의 악순환에 빠지면 금융시장은 물론 달러 약세로 수출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 경기가 나빠지면 안전자산 선호현상이 강화돼 단기적으로는 달러가 강세를 보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약세로 돌아설 것”이라며 “더 큰 문제는 달러의 높고 낮음을 떠나 변동폭이 확대돼 금융시장의 불안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주식시장, 또다시 빨간불
최근 나흘간 229포인트 급락했던 코스피시장에도 다시 빨간불이 켜졌다. 반면 채권가격은 강세(금리는 하락)를 이어갈 전망이다. 지난주 유럽 위기가 증폭되면서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강해지면서 5일 국고채 5년물 금리는 전날보다 0.13%포인트 떨어진 연 3.77%로 연중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번 주에도 이런 흐름이 이어질 전망이다. 미국 신용등급 강등으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도 작아졌다. 그동안 물가 상승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릴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세계 경제가 불안해지면서 동결 전망이 힘을 받고 있다.

엔고에 시달리는 일본도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을 주시하고 있다. 일본 재무성은 4일 엔고 저지를 위해 4조5000억 엔(약 60조원)을 풀어 달러를 사들였지만 미국 신용등급 하락으로 효과가 사라질 위기다. 미국과 유럽이 잇따라 위기에 처하면서 달러와 유로화 가치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세계 경기 침체 우려로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이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은 시장의 불투명성을 한층 높였다”고 지적했다. SMBC닛코증권의 고바야시 히사쓰네 국제시장분석부장은 “다음 주 열리는 미 공개시장위원회(FOMC)가 3차 양적 완화를 비롯한 어떤 대책을 내놓을지가 관심의 초점”이라고 말했다.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곳은 중국이다. 전체 외환보유액 3조2000억 달러 가운데 1조1500억 달러를 미국 국채로 보유하고 있다. 일본도 외환보유액 1조1000억 달러 중 8000억 달러를 미국 국채로 들고 있다. 안전자산이어서 잔뜩 사들였는데, 이번 신용등급 강등으로 국채 값이 떨어지면 손해 볼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렇다고 팔려고 내놓았다가는 값이 급락할 우려가 있고, 현실적으로 마땅한 대체 투자수단도 없다. 관영 신화통신은 6일 대외용인 영어 논평기사를 통해 “미국이 빚의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능력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상식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신용등급 하락에 따른 더블딥을 피하기 위해 3차 양적 완화에 나설 경우 환율전쟁이 가열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JP모건체이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브루스 카스만은 “모든 국가가 자국의 통화가치를 내리려 하고 있다”며 “달러 공급이 늘어나면 달러 가치는 내려가고, 통화가치가 상대적으로 상승한 국가는 다시 통화가치를 낮추려고 시장에 개입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각국이 통화가치를 낮추기 위해 유동성 공급을 늘리면 이미 물가 상승률이 높은 브라질이나 동남아시아는 물론 물가 상승률이 낮은 스위스나 일본까지 인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할 상황에 몰릴 수 있다”고 보도했다.

각국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위기 탈출의 해법으로 삼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헤지펀드인 애틀랜타소버린 다이버시티펀드 설립자인 리 로빈슨은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 “대놓고 디폴트를 선언하는 대신 인플레이션을 통해 실질적인 채무 부담을 낮추는 ‘스텔스 디폴트(눈에 보이지 않는 채무불이행)’ 전략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빚을 갚으려면 긴축을 해야 하는데, 긴축은 실물경제 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부는 대신 돈을 마구 찍어 내 자국 통화의 강세도 막고 경기도 부양하려 든다는 것이 로빈슨의 예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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