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 행복하다면, 울어야 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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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호 27면

남자들은 세 번 운다. 맞다. 태어나면서 운다. 이미 한 번을 울어 버렸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한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 땅을 치며 이를 간다. 누가 이런 공식으로 올가미를 씌웠을까.

삶과 믿음

남자들도 자주 운다. 그게 맞다. 아니 울고 싶을 때가 많다.
직장 일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 동네 축구공 같다. 밑에서 치고 올라온다. 위에서는 찍어 누른다. 성과는 오르지 않고 답답하다. 하루하루가 피곤하다. 은퇴를 생각하면 속은 시꺼멓게 타 들어간다.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 30대 남성들의 30%가 전립선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40대엔 40%다. 50대가 되면 70%로 건너뛴다. 여성들의 요실금만큼이나 공포스럽다. 세뇨(細尿)·빈뇨(頻尿)·지연뇨(遲延尿)·잔뇨(殘尿)·혈뇨(血尿)….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다. 제집 녀석은 재수를 하고도 빌빌거리고 있는데 친구 아들은 4년 장학금에 기숙사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 효자가 없다. 그러면서 한턱 쏘겠다고 한다. 술이 술이 아니다. 이미 독배를 들고 있는 셈이다. 이럴 때는 하염없이 울고 싶다. 그러나 울지 못한다. 그래서 술로 눈물을 대신한다. 술은 ‘남자들의 눈물’이다. 벌컥벌컥 들이켠다. 남자들의 통곡이다.

가장들의 마음을 이상국 시인은 이렇게 묘사한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 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중년의 일상이다.

술에 취해 밤늦게 들어서는 남편에게 닭살 돋는 소리지만 이렇게 말해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여보, 술은 남자들의 눈물이라는데 그 눈물 함께 흘리지 못하는 내가 죽일 년(?)이지.” 남자들은 돌아누워 밤새운다.

한국의 가장들은 너무 긴 시간, 무호흡증으로 살았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고 다그치는 바람에 많은 남자가 술을 눈물로 대신해 버렸다. 비극이다. 누선(淚腺)은 생명샘이다. 웃어서 행복하다면 울어야 산다. 찌질하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울어야 한다.

J J 루소는 권한다. ‘무조건 우십시오. 무차별적으로 우십시오. 무시로 우십시오. 무수히 우십시오. 무릎을 꿇고 우십시오. 무안을 당하더라도 우십시오. 무엇보다 먼저 우십시오’. 그때 우리는 칼릴 지브란이 말했던 ‘눈물이 내 가슴을 씻어주고 인생의 비밀과 감추어진 것들을 이해하게 해 준다’(눈물의 신비)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예수도 울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브리서 5장 7절).

아내들이 쉬 타박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일생에 단 한 번 우는 새가 있는가 하면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새도 있다. 낙타는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들의 눈물을 ‘낙타 눈물’이라고 한다. 이런 마음을 알기나 할까.

젖은 눈의 눈물을 볼 줄 아는 아내를 둔 남자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다시 울지 않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이상국).



송길원 가족생태학자.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 대표로 일하고 있다. 트위터(@happyzzone)와 페이스북으로 세상과 교회의 소통을 지향하는 문화 리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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