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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세탁해 시리아 권부 침투 … ‘6일 전쟁’ 승리 1등 공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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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호 28면

유대인은 매사에 치밀하고 효율성을 높이 산다. 이스라엘 첩보요원의 정교한 공작 역량이 입증 사례다. “기만으로 전쟁을 수행한다(By way of deception, thou shalt do war)”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에 꼭 들어맞는 간첩이 있었다. 엘리 코헨(Eli Cohen·사진)은 근대 첩보사의 가장 뛰어난 스파이로 평가받는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전설의 스파이 엘리 코헨

코헨은 1924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시리아계 세파라디 유대인이다. 아버지 사울은 시리아 알레포 태생이며 이집트로 이주한 뒤 소규모 의류상을 경영했다. 코헨은 20세가 되던 44년 국제시온주의운동에 가담해 이집트 유대인 1만여 명의 이스라엘 이주사업에 참여했다. 57년엔 이스라엘 군 방첩대 분석관으로 복무했다. 60년대 초부터 모사드는 코헨을 해외공작요원으로 관리한다. 아랍어에 능통한 그는 카멜 아민 타베트로 이름을 바꾸고 시리아 사업가로 위장해 61년 아르헨티나로 떠난다. 제3국을 통한 우회 침투다. 국적과 신분을 세탁하는 과정이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엔 시리아·레바논·팔레스타인 이민자로 구성된 아랍 공동체가 있다. 특히 아르헨티나엔 남미 최대 규모의 유대인 사회가 있다.

군 고위층에 밀회 장소 제공해 정보 수집
코헨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리아 교민사회에 침투한다. 특히 아민 알하피즈 시리아대사관 무관에게 접근해 빠른 시간 내 친분을 맺었다. 그는 이듬해 이스라엘로 잠시 돌아가 통신훈련을 받고 특수무전기를 지급받는다. 같은 해 시리아로 들어간 코헨은 군 고위 장교와 정부 고관들에게 접근해 어울린다. 또 이들의 도움으로 전략적으로 민감한 요충지인 골란고원 벙커 등 군사시설을 시찰한다. 기억력이 비상한 코헨은 고원 지형, 시리아군 배치와 화력 상황, 소련이 제공한 군장비 등을 머릿속에 암기해 이스라엘로 송신했다. 여기에다 코헨은 번득이는 기지도 발휘했다. 그는 골란고원 참호 입구에 나무를 심어 군사시설을 감추라고 시리아 군 지휘관들에게 조언한다. 시리아 군 당국은 코헨의 권유를 받아들여 대거 식목사업에 나섰다. 코헨의 기발한 공작 때문에 이스라엘 전투기는 67년 ‘6일전쟁’에서 나무를 표적으로 시리아군 참호를 쉽게 공격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부터 코헨과 가까운 사이였던 하피즈 장군은 63년 범아랍사회주의를 표방한 바트당 쿠데타를 주도해 대통령이 됐다. 하피즈는 코헨의 든든한 후견인이 돼 줬다. 코헨은 자신의 집을 시리아 군부 고위 인사들의 엽색 행각을 위한 밀회 장소로 제공해 이들과의 교분을 더욱 돈독히 하면서 추가로 많은 군사정보를 빼내 텔아비브로 보냈다. 하피즈의 전적인 신임을 받은 코헨은 바트당 국방위원에 위촉되고 국방차관으로 내정된다. 그는 시리아 권력서열 5위권에 진입했다.

코헨의 마각은 끝내 덜미를 잡혔다. 65년 1월 시리아 방첩대는 수도 다마스쿠스에 주재하는 외국공관으로부터 괴(怪)전파로 인한 통신장애 신고를 받는다. 하지만 당시 시리아의 기술과 장비론 이 전파를 찾아내지 못해 소련에 기술 지원을 요청했다. 소련 기술진도 코헨이 사용하던 정밀 송신기를 추적하지 못했지만 대신 꾀를 냈다. 다마스쿠스 일원에 일시적으로 정전 상태를 만들어 정전 중에도 교신하는 첩자를 색출했다. 그간의 성과에 자만한 코헨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다. 정전이 되면 통신을 중단해야 했는데도 배터리를 이용해 이스라엘과 계속 교신한 것이다. 송신 지점을 확인한 시리아 비밀경찰은 코헨의 숙소를 급습해 한창 무전기를 조작하고 있던 그를 체포했다. 코헨의 정체를 알고 격분한 하피즈는 그를 직접 신문해 협조자 수백 명을 색출하고 투옥시킨다. 코헨은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시리아, 간첩 10명과 맞교환 제의 거부
이스라엘은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코헨의 사형 집행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프랑스·벨기에·캐나다 그리고 교황을 동원해 시리아에 외교 압력을 가했다. 시리아와는 협상에 나섰다. 시리아 간첩 10명에다 현금과 물자를 합쳐 코헨과 맞교환하자고 제의했다. 시리아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많은 국가 기밀과 주요 인사의 사생활 약점까지 알고 있는 코헨을 살려 둘 수 없었다. 마침내 코헨은 65년 5월 18일 새벽 다마스쿠스 중심가 광장에서 공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측에 코헨의 유해를 돌려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시리아는 묵살했다.

희대의 간첩 코헨이 보낸 특급 정보는 그가 죽은 뒤 이스라엘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스라엘은 67년 3차 중동전인 ‘6일전쟁’에서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작전 개시 수시간 만에 시리아의 군 요충지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이를 통해 코헨은 첩보원의 전설로 다시 태어났다. 2002년 미국 수도 워싱턴엔 ‘국제스파이박물관’이 설립됐다. 이곳에선 코헨의 공작상을 소재로 만든 영화 ‘불세출의 간첩(The Impossible Spy)’을 방문객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서방 정보기관은 제2차 세계대전 후 40여 년의 냉전기간 중 막강한 실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90년대 초 공산권이 해체되자 한동안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오랜 주적이 갑자기 사라질 것에 대한 준비가 없었다. 90년대 이후 나온 제임스 본드 영화는 냉전 당시에 비해 줄거리 구성이 엉성해졌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달랐다. 여러 차례의 중동 평화회담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주적 의식과 시온주의로 무장하고 역량을 배가시켰다. 정보기관은 긴장과 주적의식 속에 발전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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