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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스 디폴트’에 베팅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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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리 로빈슨(사진 왼쪽)


위기가 모든 사람에게 비극은 아니다. 극소수지만 누군가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때 ‘헤지펀드의 신성(新星)‘으로 떠오른 존 폴슨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자산운용사 존폴슨의 회장이다. 이번엔 누구일까. 파이낸셜 타임스(FT)는 4일(현지시간) 리 로빈슨이란 인물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았다. 그는 헤지펀드인 애틀랜타소버린다이버시티펀드 설립자 겸 펀드매니저다. 그는 종목이나 특정 자산에 베팅하지 않는다. 거시경제 변수를 예측해 게임을 벌인다. 이른바 ‘거시경제 헤지펀드’다.

로빈슨은 아주 생소한 ‘스텔스 디폴트(Stealth Default)’ 가능성에 베팅해 놓고 있다. 말 그대로 풀면 ‘눈에 보이지 않는 또는 감지되지 않는 채무불이행’이다. 그는 “앞으로 각국은 드러내놓고 채무불이행을 선언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대신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채권자들이 받을 돈을 줄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가 예상한 방법은 화폐 가치 하락(꾸준한 인플레이션)이다. 미국과 유럽은 막대한 채무를 짊어지고 있다. 빚을 갚고 채권시장 참여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지금은 재정 지출을 줄이는 긴축을 단행하고 있다.

 그러나 로빈슨은 “긴축이 오래 가기는 힘들다”고 단언한다. 긴축 등으로 실물경제 침체가 심해지면 미국과 유럽 등이 더 많이 돈을 찍어 경기부양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과 유럽이 돈을 마구 찍어내는 바람에 개인의 자산 가치가 30~60% 정도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채권 가치의 하락이다. 돈을 받을 사람은 ‘자신이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스텔스)’에 돈을 떼이는 셈이다.

 이는 경제학자 케인스가 말한 ‘재산 징발 효과’를 일으킨다. 케인스는 “국가는 (경기침체 등으로 대중 불만이 커지면)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아주 은밀히 개인 재산의 상당 부분을 징발해 간다”고 말한 적이 있다.

 로빈슨이 베팅한 국가는 미국만이 아니다. 독일·프랑스·영국·이탈리아·스페인 등 주요 선진국은 다 포함돼 있다. 이들 통화로 발행된 국채 등을 공매도 해놓고 있다. 통화 파생상품 시장에선 풋옵션을 즐겨 사용한다. 이들 자산이 떨어지면 싸게 사서 약속한 값에 건네주고 차익을 챙기는 전략이다. 값이 떨어질수록 로빈슨의 주머니는 두둑해진다.

 로빈슨은 미 투자전문지인 인스티튜셔널인베스터스(기관투자가)에 “장기적으로 세계 경제를 비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선진국 채권이나 주식을 사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게임”이라며 “요즘 더블딥 우려가 커지는 것으로 봐서 내 예상이 조만간 실현될 듯하다”고 말했다.

강남규 기자

◆스텔스 디폴트(Stealth Default)=‘눈에 보이지 않는 또는 감지되지 않는 채무 불이행’이다. 빚에 허덕이는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채권자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사실상 돈을 떼먹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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