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독도 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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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 관동군(關東軍) 독립수비보병 대대의 고모토(河本末守) 중위는 심양(瀋陽)역 북쪽 유조호(柳條湖) 부근의 남만주 철도 선로를 폭파했다. 그러고는 이를 중국군 소행이라 우기면서 만주 전역을 점령하는 만주사변(9·18사변)으로 확대했다. 이 사건은 와카스키(若槻禮次郞) 수상 내각이 아니라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板垣征四郞) 대좌와 이시하라(石原莞爾) 중좌의 기획이었다. 3년 전인 1928년 6월 3일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 탄 특별열차를 심양 부근에서 폭사시킨 사건도 관동군 참모 고모토(河本大作) 대좌의 기획이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조선상주군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조선상주군사령관이었던 하야시(林銑十郞)는 만주사변 당시 내각의 승인도 없이 관동군의 요청으로 압록강을 불법 월경한 ‘월경장군’이었다. 장쭤린 폭사 때도 조선상주군 공병대 기리하라(桐原貞壽)가 반출한 200kg의 화약이 사용됐다.

 장성도 아닌 일개 영관급 장교들이 내각을 제치고 전쟁까지 결정할 수 있었던 근거는 일본 헌법에 있었다. 188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제정한 일본 헌법 12조는 “천황은 육해군의 편제(編制) 및 상비군의 숫자를 결정한다”고 군사 숫자까지 천황 관할로 명기해 놓았다. 원래는 “육해군의 편제는 칙령(勅令)으로 정한다”고 해, 칙령을 심의하는 추밀원 산하로 두려 했으나 이토가 ‘육해군의 편제와 상비군 숫자’까지 천황에게 넘기면서 군부는 내각과 의회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일본 군부는 내각이 아니라 천황에게 직속된다는 통수권(統帥權) 개념으로서 쇼와(昭和:1926~89)시대 전 세계를 불바다로 만든 전쟁광들의 전쟁 명분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이 자행한 모든 침략전쟁은 일왕에게 무한책임이 있다.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1946년 1월 1일 소위 ‘인간선언(人間宣言:닌겐 센겐)’이란 희극을 연출하고 신에서 인간으로 내려오자, 맥아더 사령부는 1946년 6월 전범 혐의를 벗겨주었다. 현재 독도를 도발하는 일본 극우파들이 전범의 후예거나 과거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존재들이란 사실은 이 도발의 뿌리가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형하지 못한 역사 청산 좌절에 있음을 말해준다. 일본 극우파의 독도 도발에 우리는 일본 헌법상 최고 전범일 수밖에 없는 일왕 히로히토의 책임을 공개적으로 묻고, 나아가 현행 천황제 해체를 요구하는 것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의 요구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