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Eric Rohmer), 마음의 풍경을 담아내는 인상주의자

중앙일보

입력

옛 친구의 애인이 뻗쳐오는 유혹의 손길에 응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지는 장 루이(<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가장 친한 친구의 연인과 어느새 사랑에 빠졌음을 알고는 심리적인 혼란을 겪게 되는 블랑슈(<내 친구의 남자 친구>), 현재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두 남자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옛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 미혼모(<겨울 이야기>), 세 여자에게 둘러싸여 감정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는 대학원생 가스파르(<여름 이야기>), 그리고 친구가 소개해 준 남자가 마음에 들긴 하지만 도대체 이 다가올 새로운 사랑에 대해 서툴기 짝이 없는 그런 설익은 태도를 보여주는 중년 여성 마갈리(<가을 이야기>)...

교사, 평론가, 잡지 편집인, 제작자, 영화 감독을 거쳤던 경력상의 폭넓음과는 대조적으로 에릭 로메르의 거의 모든 영화들은 동일한 하나의 틀 안에서 반복과 변주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전술(前述)한 예에서 볼 수 있듯 대개 연애 문제에 골몰하지만 그것과 관련된 감정 처리에 있어서는 미숙한 사람들이다. 로메르의 영화들은 별로 '극적'일 것 같지 않은 그들의 일상사를 차분하고 담담하게 바라다본다.

로메르는 〈여섯 편의 도덕 이야기〉,〈코미디와 우화〉,〈사계절 이야기〉로 이름 붙여진 시리즈 영화들을 만든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즉 몇 편의 영화들이 한 가지 컨셉이나 모티브 아래
무리를 지어 조직된 셈인데, 사실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보자면 이 영화들 역시 '로메르 영화'라는 하나의 범주 아래 통합되는 것임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유사한 주제와 모티브를 반복하지만 다른 어떤 일반화한 범주에 집어넣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로메르의 영화들은 분명 하나의 '장르'라고도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영화는 대체로 러브 스토리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로메르 식의 멜로 드라마에는 감정 과잉의 감상주의나 삶을 초과하는 가공의 픽션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대신 일상을 차근하게 관찰하는 리얼리즘의 시선과 그로부터 삶의 미스테리를 캐내고자 하는 성숙한 혜안(慧眼)이 로메르 식의 멜로 드라마를 빚어내는 훌륭한 도구 역할을 한다.

급격한 감정의 기복도, 잘 구획된 선 굵은 이야기와 그것을 끌고 가는 재빠른 발걸음도,그리고 관객을 유인하는 촉매로서 스타도 없는 로메르의 영화는 분명 할리우드 영화와는 대척점에 위치한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들은 보는 이를 내내 매혹적인 긴장감 속에 빠뜨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것은 그 영화들 안에 세심하게 아로새겨진 인물들의 대화들, 동작과 시선들이 매순간 철학적인 사건, 도덕적인 모험, 감정의 미세한 결을 이야기해주기 때문이다.

로메르는 흔히 '모랄리스트'(moraliste)라 불리는데, 여기서 '모랄'이란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가리키는 '도덕'과는 다르다. 그에 따르면, "모랄리스트는 인간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다." 정신과 감정의 상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모랄리스트 로메르는 인간들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마음의 풍경들을 스크린 위에 섬세하게 그려놓는다. 화면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미묘한 정서를 이토록 세밀하게 그릴 수 있는 영화 감독이 영화사에 또 누가 있을까?

로메르는 결코 자신의 영화들을 끝내지 않는다. 예컨대 <가을 이야기>의 종결부에서 마갈리는 친구와 오해를 풀지만 영화는 여전히 열린 결말을 견지하기에 우리는 결코 영화가 끝났다고 생각지 않는다. 영화란, 그리고 삶이란 하나의 과정이고 그 속에 놓인 미스테리일진대 누가 그것들을 끝낼 수 있단 말인가?

주요 작품
1960년 〈사자 자리Le Signe du lion〉
1962년 〈몽소 빵집La Boulang re de Monceau〉
1969년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Ma nuit chez M명〉
1971년 〈클레르의 무릎Le Genou de Claire〉
1976년 〈O 후작 부인Die Marquise von O>
1981년 〈비행사의 아내La Femme d'Aviateur〉
1983년 〈해변의 폴린느Pauline la Plage〉
1984년 〈만월의 밤Les Nuits de la Pleine Lune〉
1986년 〈녹색 광선Le Rayon vert〉(비디오 출시)
1987년 〈내 친구의 남자 친구L'Ami de mon amie〉
1989년 〈봄 이야기Conte de printemps〉
1991년 〈겨울 이야기Conte d'hiver〉
1996년 〈여름 이야기Conte d' t 〉(비디오 출시)
1998년 〈가을 이야기Conte d'automne〉(비디오 출시)

※필자 홍성남씨는 연세대 신문방송학과와 중앙대 영화학과(석사 과정)를 졸업했으며, 현재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