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에로·그로·난센스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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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

A:“에로가 빠져서는 안 될 터인데….” B:“그럼요, 이번 ‘XX’를 봐요. 그렇게 크게 취급한 ‘재만 동포 문제’니 ‘신간회 해소 문제’니 하는 것은 성명이 없어도 ‘침실박람회’는 간 데마다 야단들입디다.” C:“참 ‘XX’ 이번 호는 그 제목 하나로 1000부는 더 팔았을걸…. 그렇지만 너무 노골적입디다.” D:“그래도 글쎄 그렇게 안 하곤 안 돼요. 잡지란 무엇으로든지 여러 사람 화두에 오르내릴 기사가 있어야 그거 어느 잡지에서 보았느냐 어쨌느냐 하고 그 책을 찾게 되지….” E:“사실이야. 아무래도 뻔적 뜨이는 큰 ‘에로’ 제목이 하나 있어야 돼, 더구나 봄인데.”(‘불도 나지 않았소, 도적도 나지 않았소, 아무 일도 없소’, 『동광』, 1931.7)

 위의 글은 소설 속 ‘M잡지사의 편집회의’의 한 대목이다. 결국 이 회의에서는 ‘신춘 에로 백경집(百景集)’이라는 ‘센세이션 백 퍼센트’짜리 제목을 뽑아 잡지에 싣기로 했다. 그리고 편집국장은 각 기자들에게 ‘에로백경’에 속할 만한 기삿거리를 찾아올 것을 주문했다.

 1930년대 한국의 신문·잡지에는 소위 ‘에로·그로·난센스’ 기사들로 넘쳐났다. 이 시기에는 서구의 대중문화, 자본주의의 성 상품화, 말초신경을 흥분시키는 퇴폐적 향락 사상 등이 유입되었다. 그 과정에서 에로티시즘을 자극하고, 그로테스크한 사건들을 추적하고, 난센스의 유머를 구사하는 담론들이 신문·잡지들의 성격과 판도를 바꾸어놓았다.(소래섭, 『에로·그로·난센스』, 살림, 2005)

 위 소설의 주인공인 기자 K는 ‘에로’ 재료를 찾기 위해 유곽으로 향하면서 자기 환멸에 빠진다. 잡지사에 입사하면서 ‘나의 붓은 칼이다.(…) 나는 한 잡지사의 기자가 된 것보다 한 군대의 군인으로 입영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다짐했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잡지 판매부수를 위해 선정적인 기사를 찾아 헤매는 자신이 ‘간상배(奸商輩)’와 같다고 생각한다.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한 위원이 ‘표현의 자유’와 ‘음란물 판정’ 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자신의 블로그에 성기 사진을 올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언론들이 이에 대해 앞다투어 쏟아낸 기사들에서는 대부분 그의 행동을 선정적이라며 비난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기사들의 제목 역시 매우 선정적이라는 것이다. ‘성기 사진’ ‘성기 노출 파문’ ‘여성 음부 그림’ 등의 어구를 넣은 그 제목들을 보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이 기사들은 그의 행동을 진정으로 비판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이런 ‘센세이션 백 퍼센트’의 사건을 이용해 또 하나의 ‘에로’ 기사를 쓰고 싶은 것일까, 하는.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