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에게 캐묻다, 어디까지가 표절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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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형서씨는 지난달 28일 본사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으며 “작가의 역할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 요소들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소설가 박형서(39)씨의 작가 행보는 이채롭다. 소설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빠르지 않지만 흔들리지 않는 걸음걸이로 꾸준하게 밀고 나가는 느낌을 준다.

 걸음걸이의 정체는 고정관념처럼 굳어져 있는 기존 소설 작법에 대한 문제 제기, 흡인력 강한 이야기성의 창조쯤 되는 것 같다.

 2003년 첫 소설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부터 그랬다. 표제작 단편은 기르던 토끼가 죽자 이를 슬퍼하던 아내가 토끼를 흉내내다 못해 따라죽는 내용이다. “사건과 행동의 인과관계, 현실적 개연성 등이 파문에 가깝게 방치된다”(문학평론가 우찬제)는 평을 들었다.

 2006년 두 번째 소설집 『자정의 픽션』에 실린 단편 ‘논쟁의 기술’에서는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다. ‘삼국지’ 장판교 싸움에 얽힌 사소한 사실관계를 둘러싼 두 대학교수의 치졸한 논쟁이 삼국지 장수가 현실로 뛰쳐나와 둘 중 한명을 죽임으로써 막을 내린다. 지난해 나온 첫 장편 『새벽의 나나』는 태국 사창가를 배경으로 한, 500년 세월을 건너뛴 남녀의 사랑 이야기.

 올해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아르판’은 문학계의 해묵은 논쟁 중 하나인 표절 문제를 다뤘다. 이야기의 원전(原典)은 과연 존재하는가, 표절은 어떤 조건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 말이다.

 20대 후반 초짜 작가 시절, 나는 태국과 버마 국경지역의 고산족인 와카족 마을을 찾았었다. 예술가라면 보통사람과 다른 삶을 경험해봐야 한다는 작가적 열정에서다. 그곳에서 나는 와카족의 유일한 소설가 아르판을 목격한다. 와카족 말을 쓰는 사람이래봤자 고작 200여 명. 아르판의 글쓰기는 사실상 누구에게 읽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캄캄한 밤에 호롱불을 밝혀놓고 외로이 글을 쓰면서도 스스로의 문장에 도취돼 가끔씩 미소짓곤 하는 아르판의 모습에서 나는 무한한 감동을 받는다. 십여 년 후 나는 한국에서 유명작가가 됐다. 아르판의 작품을 표절한 소설로 큰 성공을 거뒀다. 제3세계 작가들이 참가하는 문학행사의 조직위원장이 돼 아르판을 초청한다. 죄책감을 덜고 표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강변할 생각이었던 것. 서울 명동의 한 포장마차에서 둘의 기싸움이 펼쳐진다.

 박씨는 “『새벽의 나나』의 ‘작가의 말’에서 밝혔던 생각이 ‘아르판’에 녹아 있다”고 말했다. 독자들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익숙한 이야기지만 혼돈 상태로 있는 것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한 게 자신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이야기의 파편들을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세상의 모든 작가는 하나”라는 철학이 깔려 있다.

 때문에 소설의 주인공 나는 표절에 관한 한 죄가 없다. 표절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런 생각이 소설의 씨앗이라면 씨를 싸고 있는 과육은 ‘나’의 비열한 내면, 이국적 소재를 버무려내는 박씨 특유의 입심 같은 것들이다. 그런 요소가 소설을 재미 있게 한다. 박씨는 “소설 안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박형서=1972년 춘천 출생.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자정의 픽션』, 장편 『새벽의 나나』 등. 2010년 대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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