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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본심 후보작 지상중계 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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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소설가 김이설씨는 늦깎이 등단한 편이지만 최근 부쩍 각광을 받고 있다. 단편 ‘부고’로 올해 황순원문학상 본심에 처음 올랐다. 그는 “힘들게 썼고 부족한 게 많은 작품인데 황순원문학상 후보에 올라 솔직히 좀 부담스럽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남들과 다른 이야기를 쓰겠다며 대뜸 필명을 ‘이설(異說)’로 지은 소설가 김지연(36)씨. 이번 주초 만난 그는 조금 피곤한 표정이었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계간지 단편소설을 마무리하느라 계속해서 밤잠을 설친 탓이었다. 이틀 정도는 하루 한두 시간씩 자며 버티고 삼일째는 ‘퍼지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일곱 살과 세 살, 어린 두 딸을 재우고 이런저런 집안일을 마치고 나면 한밤중. 이때부터 주부 김지연 아닌 소설가 김이설의 생활이 시작된다.

 그런 치열함 때문이었을까. 그동안 그의 소설적 행보는 김이설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것이었다.

열세 살 노숙자 소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야말로 민망한 우리 사회의 밑바닥 삶을 고발한 등단작 ‘열세 살’부터 주부 매춘을 소재로 한 최근 장편 『환영』까지. 그가 펴낸 세 권의 소설은 또래 소설가들과는 확실히 다른 입지를 구축했다. 평단은 “환상, 유령, 가상현실, 무중력 상태 등 비현실적 요소가 가득한 2000년대 소설들 틈에서 돋보인다”(평론가 백지은)고 평가했다.

 후보작 ‘부고’는 이전 작품들처럼 하류 인생을 다루지는 않는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를 둔 어찌 보면 중산층 출신 여성이 주인공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얽히고 설킨 가족관계, 막장드라마 같은 착잡한 현실을 특유의 냉담한 문체로 그려낸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 일종의 가족극.

 첫 장면부터 독자는 잠깐 어리둥절해진다. 여주인공 은희에게 새벽 세시에 전화한 엄마가 “네 엄마가 죽었다”고 담담히 전한다.

앞의 엄마는 키워준 엄마, 뒤의 엄마는 아버지의 외도를 견디지 못해 30년 전 집을 뛰쳐나갔다가 이태 전에 돌아와 시름시름 앓아 왔던 친엄마다. 앞머리에 도발적인 에피소드를 배치한 것도 이를테면 김씨의 장기다. 소설의 첫 두 문장은 “역한 비린내가 났다. 정액 냄새라고 생각했는데, 비 때문이었다”이다. 30대 중반인 은희는 연하의 한국계 미국인 상준과 2년째 동거중이다. 은희 앞에서 팬티를 주워입은 상준은 위로한답시고 은희를 껴안는데, 은희는 그의 몸이 아직도 뜨거운 상태라고 느낀다.

 치정(癡情)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소설은 차츰 골치 아픈 은희의 성장사, 가족사로 달려간다.

은희는 10대 중반에 동갑나기 소년들에게 윤간당해 아이가 생겨 이를 지운 적이 있다. 주동자는 놀랍게도 아버지의 외도로 태어난 동갑나기 배다른 남자 형제. 소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키워준 엄마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키워준 엄마와 의붓 딸간의 서먹하던 사이가 급격히 가까워진 것은 동병상련의 심정 때문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키워준 엄마가 자신의 친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은희의 아버지와 일종의 계약 결혼을 했다는 점이다. 친자식이 결혼해 더이상 부양할 필요가 없어지자 키워준 엄마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끝낸다.

 비정한 가족이다. 헤밍웨이의 메마른 문체를 연상시키는 김씨의 짧은 문장들이 비정함을 배가시킨다. 김씨는 “아픔이나 상처, 흉터 같은 것들을 감추기 위해 끊임 없이 거짓말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상처를 주는 연쇄적인 인간관계의 서글픔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신준봉 기자

◆김이설=1975년 충남 예산 출생.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장편 『나쁜 피』 『환영』.

단순해서 새롭다, 흙장난하듯 쓴 시

시 - 나희덕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외 17편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손보다는 섬모가 좋다

인간다움이 제거된 부드러운 털이 좋다

둥글고 잘 휘어지는 등이 좋다

구불구불 헤엄치는 무정형의 등이 좋다

휩쓸고 지나가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온순한 맨발이 좋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매순간 새롭게 생겨나는 위족이 좋다

때로 썩어가는 먹이를 구하지만

소화시킬 수 없는 것은 다시 내보내는 식포가 좋다

맑은 물에도 살고 짠물에도 살며

너무 많은 물은 머금지 않는 수축포가 좋다

물과 공기가 드나드는 투명한 막이 좋다

일정한 크기가 되면

둘로 쪼개지는 가난한 영토가 좋다

둘로 나뉘지만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아서 좋다

그는 사랑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찾아온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끌어안았던 태고의 신비,

그 저녁의 온기를 기억해낸 것뿐이다

섬모와 섬모가 닿았던 감촉을 다시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시인 나희덕씨는 관능적인 언어로 아메바 같은 원시적 동물을 표현해 올해 미당문학상 본심에 올랐다. 함돈균 예심위원은 “사물의 욕망과 시적 주체의 욕망이 같을 수 있다는 점을 마술적 감각으로 보여준다”고 평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올해 미당문학상 예심에선 나희덕(45) 시인을 놓고 “너무 유려하고 너무 능숙해 무슨 소재로든 다 잘 쓰는 게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다”(최정례 예심위원)는 평이 나왔다. 장점이 단점일 수 있다 할지언정 나희덕 시인이 자타가 공인하는, 잘 쓰는 시인임은 분명하다. 그는 미당문학상이 시작된 첫 해(2001년)부터 6년간 내리 빠짐 없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 한동안 뜸하다 5년만에 본심에 오른 것이다. 뜸하던 그 시기, 일년간 일부러 시를 한 편도 쓰지 않은 적도 있었다.

 “나와 거리를 두고 몸이 바뀌는 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남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지만 저는 시 쓸 때 몸이 다르게 반응한다는 걸 느껴요.”

 자신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시·공간까지도 달리 놓이게 했다. 다른 나라의 언어나 문화를 경험하러 자주 떠났다. 지난 한 해 동안 발표한 시의 상당수가 외국 여행에서 본 풍경을 소재로 쓴 것이다. 그러나 여행시라는 느낌은 전혀 주지 않는다. 이국적 풍경이 세계의 한 단면으로서 내면에 자리잡을 때까지 조금 기다렸기 때문이다. 시인은 신문에 실릴 대표작으로는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을 골랐다. 흔히 ‘단세포’라 놀림 받는 존재인 아메바에게서 시인은 ‘일정한 크기가 되면/둘로 쪼개지는 가난한 영토가 좋다’며 자기를 비우고 쪼갬으로써 얻는 충일함을 읽어낸다.

 “다른 존재를 향한 시선이 열리길 바라는 열망이 컸어요. 아메바나 불가사리 같은 아주 원시적인 생명체들, 인간과는 좀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진 것에 대한 관심이 가더군요.”

 시를 쓰는 방식도 약간은 아메바처럼, 단순하게 변했다. 예전엔 시적 대상이 충분히 체화되고 의미가 명료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삭혔다. 일단 종이에 옮겨 적으면 고치지 않아도 한 편의 시가 나오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적인 대상이 가진 파동이 아주 모호할 때 그 안에 쑥 들어가 몸을 싣는다.

 “옛날엔 작품을 만드는 장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어린애 흙장난하듯 물렁물렁한 걸 갖고 노는 듯한 느낌이죠. 지금이 시를 쓰는 순간은 더 좋아요.”

이경희 기자

◆나희덕=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집 『뿌리에게』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 『 어두워진다는 것 』 『 사라진 손바닥 』 『야생사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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