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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50주년 베스트 작품 오태석의 '태'

중앙일보

입력

한국 연극계의 큰 기둥인 오태석이 올해로 환갑을 맞았다. 하지만 외모나 행동은 여전히 장난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악동 같다. 바짝 깎은 머리칼, 부리부리한 눈빛, 직업 배우를 뺨치는 즉흥 연기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지난 15일 국립극장 사무동 3층 연습실. 그가 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국립극단 배우들에게 일장 설교를 한다.

"엄마 자궁에서 나오지 않은 사람 있어. 엄마는 또 할머니에서 나왔지. 그 자궁의 긴 터널엔 숱한 고통과 몸부림이 있는 거야. 세상은 기세 등등하게 디지털로 치닫지만 생명은 거꾸로 아날로그로 가야 해. "

오태석 작.연출의 '태' 가 다음달 1~9일 국립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올해로 창단 50돌을 맞은 국립극단이 역대 공연작 1백85편을 놓고 연극인.평론가 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태' 를 베스트 작품으로 선정한 것.

정상철 국립극단장은 "괴테의 '파우스트' 가 1위에 올랐지만 한국 고유의 현대적 연극양식을 창조했다는 점을 평가해 '태' 를 국립극단 50주년 기념작으로 뽑았다" 고 설명한다.

'태' 는 우리의 언어.몸짓을 줄기차게 찾아온 오태석의 대표작. 1974년 초연 이후 미국 라마마 극장(1976년) .아시안게임 초청공연(86년) , 일본 NHK 방영(87년) , 일본 3대 도시 순회공연(94년) 등 외국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이런 '유명세' 와 달리 '태' 의 내용과 구성은 매우 간결하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소재로 권력과 생명 문제를 파고 든다. 불충이군(不忠二君) 의 사육신과 세조를 인정하는 현실파의 대립, 사육신의 혼령에 정신이 흐려진 세조와 이를 바로 잡으려는 신숙주의 갈등이 표면 구조다.

그러나 작품의 메시지는 다른 쪽에서 펼쳐진다.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의 며느리가 삼족이 멸하게 되자 뱃속의 아기를 살리려고 시할아버지 박중림을 세조가 보는 앞에서 살해한다. 세조는 딸이 태어나면 살려주고 아들이 태어나면 죽이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아들이 태어나자 며느리는 종의 자식과 자기 아기를 바꿔치기 한다. 여기에 자식을 잃은 종의 아내가 절규를 토해내면서 작품은 관객을 숨막히는 긴장으로 끌어들인다.

세조는 뒤늦게 아이들이 바뀐 사실을 알게 되나 아이를 살려주라는 어명을 내린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도 생명은 손댈 수 없다고 깨달은 것.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의 반목과 갈등이 사라지는 것을 암시하며 작품은 막을 내린다.

이렇듯 '태' 는 종교적 비장함과 신화적 상상력이 깃든 작품이다. 검은 무대와 흰 상복의 대조, 신시사이저 생음악과 국악기의 조화, 명창 안숙선의 소리 등이 어울리며 관객의 마음을 묵직하게 채워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과제도 있다. 과연 2000년판 '태' 는 어떤 시사성이 있을까. 사실 '태' 는 군사정권이 득세했던 70~80년대에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은유의 정치극으로 읽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복제양.복제돼지가 등장할 정도로 생명이란 개념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는 세상이 아닌가.

오태석의 답변은 명료하다. "이제는 저항에서 화해다. 이번에 대본을 수정하면서 세조가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을 강조했다. 그도 남만큼 상처를 받아야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견강부회(牽强附會) 로 들리겠지만 이젠 남.북한의 화해를 꿈꾼다. 또 아무리 세상이 뒤집혀도 생명에 대한 외경은 망각할 수 없다. 복제동물은 기호이지 생명이 아니다."

대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되는 것도 부담이다. 국립극장은 객석 1층의 세 번째 자리까지 무대를 돌출시키고, 2.3층을 폐쇄하는 등 무대와 관객의 거리를 최소화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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