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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매싱 펌킨스

중앙일보

입력

시카고의 별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는 지난 세기말의 음악사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90년대 음악계의 지표와 같은 존재이다. 헤비메틀씬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8년, 보컬리스트이자 기타리스트인 빌리 코건(Billy Corgan)과 금발의 베이시스트 다아시 렛츠키(D'Arcy Wretsky), 그리고 일본계 기타리스트 제임스 이하(James Iha)와 드러머 지미 챔벌린(Jimmy Chamberlin)의 라인업으로 결성된 이들은 데뷔작 〈Gish〉('91)를 거쳐 〈Siamese Dream〉('93)과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95), 그리고 〈Adore〉('98)에 이르기까지 90년대 음악계의 조류를 정확하게 반영한 각각의 작품들을 통해 착실한 성공의 경로를 밟아왔다.

하지만 스매싱 펌킨스가 최근 발매한 신작 〈Machina/The Machines Of God〉('00)은 그에 반하는 모습을 보인다. 〈Siamese Dream〉과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의 양단을 아우르는 친숙한 사운드. 모험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안정적이다. 전작에 보인 대중과 평론가들의 반응에 빌리 코건이 상당한 실망감을 표명할 정도로 〈Adore〉는 그가 의도했던 모든 것을 담아낸 예술의 완결본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만 5백만 장 이상을 팔아치운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에 비해 전세계적으로 고작 3백 만장의 판매고를 올린 이 앨범의 실패는 누가 보아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농밀한 퍼즈톤의 기타 리프와 노이지한 사운드에 길들여져 있던 밴드의 기존 팬들은 〈Adore〉가 들려주는 몽환적인 전자음과 어쿠스틱 사운드의 감성적인 선율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스매싱 펌킨스는 얼터너티브 사운드의 발흥기에 위치한 몇 안되는 존재 중 하나지만 그 출발은 결코 화려하지 못했다. 1991년에 발매된 데뷔작 〈Gish〉는 그해 가장 촉망받는 앨범 중 하나로 선정되었지만 〈Nevermind〉('91)의 기세에 눌리며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본 조비(BON JOVI)와 스키드 로우(SKID ROW), 머틀리 크루(MOTLEY CRUE)와 건스 앤 로지즈(GUNS 'N ROSES) 등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헤비메틀 음악씬을 단숨에 전복시킨 너바나(NIRVANA)의 이 앨범이 시애틀 그런지라는 새로운 장르를 도래시키며 90년대 최고의 명반으로 추대되었기 때문이다.

몽환적인 기타 리프와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를 주무기로 내세운 스매싱 펌킨스는 분명 시애틀 출신의 그런지 밴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앨범이 같은 시기에, 그것도 부치 빅(Butch Vig)이라는 동일인에 의해 프로듀스 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너바나의 비교 대상으로 입에 오르내렸다. 더구나 이들이 시애틀의 신흥 레이블 서브 팝 출신이라는 점과 시애틀의 그런지 밴드들이 총출동한 영화 〈싱글스〉('92) 사운드트랙에 함께 참여했다는 사실 또한 좋은 빌미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지의 종주 너바나를 비롯하여 펄 잼(PEARL JAM)과 사운드가든(SOUNDGARDEN)이 연이어 2집을 발매하고 블라인드 멜론(BLIND MELON)과 레먼헤즈(LEMONHEADS), 스톤 템플 파이러츠(STONE TEMPLE PILOTS)와 라디오헤드(RADIOHEAD) 등 걸출한 신인들의 활약으로 얼터너티브 사운드의 황금기를 맞았던 1993년, 스매싱 펌킨스는 'Today'와 'Disarm'을 히트시킨 2집 〈Siamese Dream〉으로 그 진가를 드러냈다. 그리고 플러드(Flood:U2와 나인 인치 네일스, 디페쉬 모드의 프로듀서)를 프로듀서로 영입한 세 번째 앨범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를 통해 비로소 세계적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되었다.

1994년, '그런지는 죽었다'라는 말을 남긴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의 권총자살은 시애틀 그런지의 몰락을 재촉하는 한편 그린 데이(GREEN DAY)와 오프스프링(OFFSPRING)을 내세운 네오 펑크의 득세를 부추겼다. 브릿팝의 춘추전국 시대를 평정한 오아시스(OASIS)와 블러(BLUR), 스웨이드(SUEDE)의 미국 진출이 이어지는 가운데 발매된 스매싱 펌킨스의 더블 앨범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는 오케스트레이션을 가미한 팝 사운드로의 변이와 MTV와 그래미,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에서 획득한 수상 결과를 통해 얼터너티브 씬의 최후 승자로서 밴드의 손을 높이 들어주었다(그 사이 B-사이드 곡과 미발매 곡들을 간추린 컴필레이션 앨범 〈Pisces Iscariot〉('94)와 5장의 싱글 박스 세트인 〈The Aeroplane Flies High〉('96)가 발매되었다).

그 후 2년만에 발매된 앨범 〈Adore〉는 마돈나(Madonna)와 가비지(GARBAGE:부치 빅의 밴드)가 그랬던 것처럼 록 음악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테크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앨범은 그리 신통치 못한 반응을 얻었고 그러한 결과는 빌리 코건에게 쓰라린 상처를 남겼다.

제 42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무려 8개('올해의 싱글상'까지 합하면 9개) 부문을 수상한 카를로스 산타나(Carlos Santana)가 입증하듯 1999년은 단연 라틴 음악의 해였다. 하지만 새 천 년의 포문을 연 올 음악계의 동향은 그 어느 해보다도 다양한 사운드의 공존이 도모될 것으로 보인다. 2000년 특수를 겨냥한 인기 아티스트들의 음반 발매가 줄줄이 이어질 전망이기 때문이다.

데뷔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작품을 통해 뚜렷한 변화상을 보여온 그들이지만 스매싱 펌킨스의 이 앨범 〈Machina/The Machines Of God〉에서만큼은 아주 익숙한 모습의 그들을 만나게 된다. 지난 1996년, 약물 과용으로 사망한 키보디스트 조나단 멜보인(Jonathan Melvoin)의 죽음에 연루되어 해고되었던 탕아 지미 챔벌린을 다시 맞아들인 김에 아예 밴드의 최전성기 때로 돌아가보자는 속셈이다.

스매싱 펌킨스의 오리지널 멤버가 다시 뭉쳤다는 점 또한 이 앨범이 지닌 강점이다. 다만 〈Machina/The Machines Of God〉의 작업 종료 후 영화 배우의 길을 걷기 위해 밴드를 탈퇴한 다아시의 공백을 새로 영입된 홀(HOLE)의 베이시스트 멜리사 아우프 더 마이어(Melissa Auf Der Maur)가 얼마나 메울 수 있느냐가 이들의 가장 큰 과제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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