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바마 아버지 맞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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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 H 제이컵스가 쓴 버락 후세인 오바마 시니어(오바마 대통령의 친부)의 전기를 보면 오바마가 오랫동안 아버지의 그림자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그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 다른 버락(The Other Barack)’의 앞부분에서 그의 어린 시절 친구는 그가 툭하면 “모르면 입 다물어”라고 쏘아붙였다고 돌이킨다. 몇 장(章) 뒤에서 하와이대 문예지의 편집자는 느닷없이 그가 찾아와 잡지에 실린 시를 지적하며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소리쳤다고 회상한다. 나이로비의 한 공무원은 그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면서 자신의 라이벌을 두고 “수학이나 경제에 완전히 문외한”이라며 비난했고 다른 동료들을 “지적 난쟁이”라고 불렀다고 기억한다. 그의 대학 친구인 닐 애버크롬비(현 하와이 주지사)는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만큼 빠릿빠릿하지 못하면 너무 답답해 했으며 참지 않고 지적했다”고 돌이켰다.

신저 ‘또 다른 버락’ #미국 대통령 친부의 격정적이고 비극적인 모습 적나라하게 묘사

오바마 대통령의 자아의식은 건전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달랐다. 노련한 기자인 제이컵스가 2년 동안 12만㎞를 오가며 수집한 모든 증거는 아버지 오바마가 지독한 문제아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친구들에게 술값을 뒤집어씌우고, 음주운전 사고를 반복해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린 겉멋 든 술주정꾼이었다. 일자리를 얻으면 비협조적이고 시시콜콜 반대를 일삼아 곧바로 해고되거나 따돌림을 당했다. 상습적인 바람둥이이기도 했다. 케냐에서 미국으로 갈 땐 첫 아내 케지아 니안데가를 차버렸고, 하와이에서 하버드로 가면서는 오바마 대통령의 어머니인 앤 던햄을 저버렸다. 세 번째 아내 루스 베이커를 꼬여 케냐로 데려갔지만 폭력과 질책을 일삼으며 외도를 했다.

만약 아버지 오바마가 구제불능의 문제아에 불과했다면 그의 아들이 지금 어떤 자리에 올랐든 그에 관한 책을 읽을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읽을 이유가 있다. 오바마 대통령처럼 아버지 오바마 역시 머리가 비상하고 야심 찬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제한된 여건을 극복하고 세계 일류 학교들에 진학했으며, 새 나라를 건설하는 드넓은 정치적 희망의 순간에 뛰어들었다. 그가 완전히 실패했고, 그의 아들이 성공했다는 사실은 진정한 지도자와 막돼 먹은 사람을 구별 짓는 자질이 뭔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아버지 오바마의 가장 큰 문제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반드시 압도해야 한다는 집착이었다. 그로 인해 그가 “큰 불안감”에 시달렸다고 오바마의 어머니 베이커가 말했다. 그는 케냐 시골에서 자라면서 가능한 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으려 애썼다. 미국 유학 기회를 줬던 ‘1959년 동아프리카 학생 공수작전’ 프로그램에서 탈락하자 독자적으로 미국에 갔다. 그는 하와이 대학과 하버드대(경제학 박사과정을 밟았다)에서 비상한 각오로 수학 전문지식을 쌓았다. 독립 후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케냐의 새로운 지도층(그들 대다수는 해외에서 교육받은 젊은 엘리트였다)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주의’가 지배한 하버드대는 그의 여성편력 풍문을 듣고 장학금을 취소했다. 그는 박사 논문을 끝내기도 전에 케냐로 돌아가야 했다(결국 그는 박사학위를 따지 못했다).

그 후 몇 년간 그는 나이로비에서 청색 포드 페어레인을 몰고 내키는 대로 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박사’로 부르게 했다. 조니 워커 블랙 트윈샷을 연달아 마신다는 뜻으로 ‘더블-더블’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못 따라온다고 늘 불평하고 술에 절어 지내면서 협력자나 후원자가 될 만한 사람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이는 멋진 사람인 체했다”고 책에서 베이커가 돌이켰다. “하지만 진짜 자신 있는 사람은 허풍을 떨지 않아도 모두가 안다. 없는 자신감을 가지려 늘 술에 취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그는 총명했고 매력도 많았다. 하지만 남들이 우러러보도록 하거나 자신이 제안한 정책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완이 없었다. 자신의 불안감을 과잉 보상하느라 영향력 있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1964년 후반 그는 정부의 기획책임자 자리를 제안 받았지만 거절했다. 급여가 “눈곱만큼”이고 함께 일할 사람이 “무식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바로 그 사람이 훗날 케냐 정·재계의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이 됐다. 몇 달 후 독립한 케냐는 경제철학 백서를 발표했다. 자유시장 경제와 외국인 투자 유치를 통한 성장이 골자였다.

케냐의 좌파는 그 노선에 반발했지만 보복이 두려워 공개적으로 대안을 개진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 오바마는 대담하게 역제안을 내놓았다. 제이컵스의 말을 빌리자면 “거론된 반대안들을 창의적으로 조합”한 제언이었다. 불행하게도 그 제언에는 독재적인 케냐 대통령을 표적으로 삼은 ‘도발적인 비난’도 담겼다. 그로 인해 정부의 백서를 만든 자신의 옛 후원자와도 멀어졌다. “그에게 발언 수위를 낮추라고 수 차례 말했다”고 책에서 케냐의 정치인 피터 아링고가 돌이켰다. “하지만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완전히 ‘왕따’가 된 그는 1966년 중반 술에 취해 친구 아데데 아비에로의 피아트 승용차를 몰다가 추돌사고를 일으켜 조수석에 탔던 26세의 아비에로가 숨졌다.

그때 사고로 입은 그의 상처는 치유됐지만 정신적으론 회복하지 못했다. 고향에서 수천km 떨어져 외로움을 탔던 세 번째 아내 루스와 밤늦도록 시끄럽게 싸우는 일이 점점 잦아지면서 더 폭력적으로 변했다. 루스는 결국 그를 떠났다. 그녀가 사랑에 빠졌던 영재 하버드대 학생은 맹목적인 주색잡기에 빠졌다. 케냐 관광부의 고위직을 맡았지만 업무 중에 상관들을 흉내 내며 놀리다가 3년도 못 가 해고됐다. 곧 집마저 잃었고 친구들의 신세를 져야 했다. 다시 교통사고를 내고도 살아남은 그는 한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신도 날 원하지 않는군.”

그는 다시 호놀룰루를 찾아갔지만 모두가 어색했다. 당시 열 살이던 아들 오바마는 “아버지가 떠나기만 손꼽아 기다렸다.” 1975년 아버지 오바마는 그의 마지막 직장을 얻었다. 주로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 맡는 하찮은 금융 부문 자리였다. 당시 그의 상사는 제이컵스의 책에서 예전에는 “그가 한 기관을 이끄는 일을 맡았지만 솔직히 말해 인격적으로 부족했다”고 말했다. 1982년 그는 차를 몰다가 나무 그루터기를 들이받고 즉사했다.

제이컵스는 아버지 오바마와 그의 아들의 차이점을 강조하진 않는다. 하지만 제이컵스의 책을 읽으면 아버지 오바마는 아들의 반면교사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같은 틀에서 만들어졌지만 성격의 윤곽과 세부사항 모든 면에서 상반된다. 아버지와 달리 오바마 대통령은 헌신적이고 가정적이다.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고 흥분하는 법도 없다. 이상주의보다 실용주의를 높이 사고, 갈등보다 합의를 선호하며, 주어진 체제 안에서 일하는 기술을 터득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오로지 너무도 합리적이고 자제력이 강하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하면 섣부른 판단일지 모른다. 그의 성격이 모든 면에서 과도했던 아버지를 닮고 싶어하지 않은 결과라고 결론짓는 일 역시 그가 실제로 아버지를 거의 모르고 지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나친 단순화일지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버락’의 비극적 이야기는 현 미국 대통령의 특출한 성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담대한 희망’(오바마 대통령의 회고록 제목이기도 하다)도 좋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번역 이연화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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