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화장품’ 발상 전환, 타임 선정 ‘20세기 천재 경영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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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호 32면

고대 이집트 여성들은 따가운 태양열을 반사시키고, 벌레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꺼풀에 푸른색을 칠했다고 한다. 역사는 이를 화장품의 기원으로 삼는다. 중세 프랑스에서는 동물성 기름과 석회가루를 섞어 착색한 화장품으로 여인들이 얼굴 단장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1916년 가내 수공업 제품인 박가분(粉)과 동백기름이 등장했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화장품산업의 신화 에스티 로더

화장은 용모를 돋보이게도 하고 약점을 감춰주기도 한다. 그래서 화장품은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인간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필수품이 됐다. 전 세계 화장품 시장 규모는 2400억 달러에 이른다. 주요 시장은 미국·일본·프랑스·독일·중국 순이며 한국은 12위다.

헝가리계 미국 유대인 에스티 로더(Est<00E9>e Lauder)는 화장품업계의 신화다. 세계 화장품 기업 순위 4위인 에스티 로더 그룹은 유대인이 설립한 다른 화장품 기업인 헬레나 루빈슈타인, 레블론, 맥스 팩터 등에 비해 단연 돋보인다. 그런데 2위 P&G(미국), 3위 유니레버(네덜란드·영국 합작)의 매출액에는 면도기·세제·방향제·화장지 등도 포함돼 있다. 스킨케어 중심의 순수 화장품 기준으로만 보면 에스티 로더가 1위인 로레알(프랑스) 바로 다음가는 세계 2위다. 에스티 로더 그룹은 오리진스, 아베다, 아라미스, 바비브라운, 그리고 프랑스 다르펭, 독일 라 메르 등 고급 제품을 포함한 30여 개의 브랜드를 거느리며 연 매출 75억 달러의 화장품 기업군을 이루고 있다. 에스티 로더 그룹 브랜드는 120여 개 나라의 백화점에서 팔리고 있다.

삼촌 미용硏서 일하다 화장품에 눈떠
에스티 로더는 1906년 뉴욕 퀸스에서 조지핀 에스터 멘처(Josephine Esther Mentzer)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헝가리 태생 유대인이다. 에스티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부르던 애칭이고, 로더는 24세 때 결혼한 남편의 성이다. 수려한 미모의 에스티는 한때 영화배우를 꿈꾸었다. 고교 졸업 후 그녀는 삼촌이 운영하던 미용연구소 일을 거들면서 화장품에 눈을 뜨게 된다. 남편이 경영하던 조그만 실크공장이 망하자 그녀는 가계를 꾸리기 위해 직접 화장품을 만든다. 자기 집 주방에서 크림을 만들어 미용실을 찾아다니며 손님에게 직접 발라 주었다. 값싸고 품질 좋은 이 크림은 점차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면서 에스티는 짧은 기간에 탄탄한 사업 기반을 마련한다. 1946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에스티 로더사(社)를 설립한다.

에스티는 소위 약용 화장품 개념을 도입했다. 그녀가 피부과 전문의 도움을 받아 50년대 초 론칭한 브랜드 ‘클리니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명품이다. 또한 화장품은 여성 전유물이라는 통념을 깨고 남성용 화장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남성의 미적인 관심이 점증할 것임을 내다본 직관이었다. 64년에 내놓은 브랜드 아라미스는 이 그룹의 주력 남성화장품이다. 또한 그녀는 사업 초기의 방문판매 방식을 버리고 백화점 진출을 통해 상품과 브랜드를 고급화했다. 그녀의 백화점 입점 교섭은 집요했다. 뉴욕 색스 핍스애비뉴 백화점에 100여 차례나 신청서를 제출하는가 하면 파리 갈러리 라파예트 백화점 진출을 위해 자사 제품 향수를 백화점 바닥에 뿌려 총지배인을 감동시켰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에스티는 신상품 출시 때마다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직접 고객에게 발라주기도 했다.

에스티 로더사는 82년 어드밴스드 나이트 리페어(Advanced Night Repair)라는 최초의 세럼을 선보였고 이 제품은 이후 그룹의 베스트셀러 상품이 됐다. 에스티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중장년 연령층까지 이어지는 추세이며 또 이들이 사회활동을 하면서 피부가 쉽게 상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래서 종래의 젊은 여성 위주 화장품 라인을 중년 연령대 이후까지로 확대시켰다. 이들의 손상된 피부를 보호하고 나아가서는 재생시킨다는 개념으로 동물의 유리체(琉璃體)에 포함된 고가의 히알루론산을 주성분으로 한 보습용 리페어 세럼을 개발한 것이다.

동서양 여성 피부 특성 따라 맞춤형 제품
70년대 한때 일본 여성들이 프랑스·미국의 명품 화장품을 쓴 뒤 얼굴이 가렵고 두드러기가 난 일이 있었다. 짝퉁 제품에 속은 게 아니라 동서양 여성들의 피부 특성에 차이가 있음을 몰랐던 것이다. 예컨대 보습크림의 경우 서양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부가 얇은 동양 여성은 촉촉한 제품을 선호하는 반면 서양 여성은 다소 끈적거리고 유분감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에스티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해 같은 브랜드 제품도 대상 지역별로 맞춤형 상품을 공급했다. 에스티의 이런 아이디어는 여타 화장품 업체로 속속 전파됐다.

98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천재 경영인 20인’ 명단에 여성으론 유일하게 에스티 로더의 이름을 올렸다. 에스티는 다른 유대인 부호들과 같이 자선사업에 많은 돈을 희사했다. 그녀는 92년 유방암연구재단을 만들고 저명한 의학자를 초빙해 유방암 조기 발견 의식을 고취하는 사업을 벌였다. 또한 에스티는 세계에서 둘째로 규모가 큰 부다페스트 도하니 시나고그(규모가 가장 큰 시나고그는 뉴욕 맨해튼 에마뉘엘)의 복원사업을 위해 500만 달러를 쾌척해 유대인으로서의 국제적 연대감을 표시했다.

에스티는 심장병으로 2004년 7월 97세에 숨졌다. 그녀는 전형적인 유대인 여성의 강인함과 예지를 보여주며 항상 새로운 발상으로 경쟁업체를 압도했다. 가계를 도운다는 단순한 동기에서 출발한 한 젊은 유대인 가정주부의 패기와 도전이 마침내 세계 유수의 대기업을 낳는 결실을 보았다. 극심한 취업난으로 어깨가 축 처진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에스티 로더의 신화가 희망 모델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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