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 “1等 못할 바엔 차라리 3等 하라”

중앙일보

입력

‘슈퍼딜’을 넘어선 ‘메가딜’의 시대-. 최근 세계 인터넷 업계를 보노라면 그 말을 실감할 수 있다. 그간 소규모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불린 인터넷 업체들이 대형화되면서 이들 ‘거인’끼리의 M&A가 급속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인터넷 업체도 예외일 수 없다. 짧은 시간에 수백억, 수천억원씩 자금력을 확보한 상태의 선도 업체를 중심으로 이러한 입질이 여기저기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이제 인터넷 업계는 본격적인 ‘머징게임’으로 접어든 셈이다. 지금껏 이뤄진 M&A 사례를 짚어보고 앞으로 전개될 M&A의 예상 시나리오를 집중 분석한다.<편집자>

인터넷이란 새로운 영토에서 세력 확장 싸움이 시작됐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초 미국에서 날라온 AOL과 타임워너의 합병소식은 ‘경천동지(驚天動地)
’할 만한 일이었다. 세계 톱 간의 결합, 그것도 온라인 강자가 오프라인 강자를 먹어 치웠다는 점에서 그 충격의 파장은 더 컸다. 이는 국내에서도 ‘거인’들끼리의 인수·합병(M&A)
이 본격화될 것이란 신호탄이었다. 신생 기업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가는 국내 인터넷 시장도 먹고 먹히는 냉엄한 ‘정글’ 시대에 들어갔다는 얘기다.

산업사회를 지배하던 경제원칙 중 하나는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
’-. 이는 인터넷 경제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이트 이용자수나 서비스 규모면에서 ‘거인’들을 당할 방법은 여전히 없기 때문이다. 수직적인 통합 외에 사업 다각화를 통해 ‘범위의 경제(economy of scope)
’를 달성하는 것 역시 인터넷 경제에서도 유효한 경쟁력의 원천이다. 직원 수가 1천명이냐, 1백명이냐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얼마나 많은 영역을 커버하는가가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콘텐츠의 다양성은 인터넷 포털들에게 가장 큰 무기가 된다. 포털기업들이 우수한 콘텐츠 제공 기업을 M&A 매력도 1순위로 꼽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인터넷 포털 라이코스코리아가 지난 1월 깨비메일을 인수한 것이 그 예다. 무료메일·커뮤니티 서비스를 해온 깨비메일 인수를 통해 라이코스는 단숨에 회원 2백만명의 대형 사이트로 부상했다.

국내 최대의 회원수를 자랑하는 다음커뮤니케이션이 실시간 메시징 서비스업체인 유인커뮤니케이션의 지분을 인수한 것도 마찬가지 경우다. 다음은 지난 2월 초 유인의 지분 70%를 약 2백10억원에 인수했다. 이로써 다음의 회원수는 7백90만명으로 늘어났고 쌍방향 통신을 위한 핵심기술도 얻게 되었다. 포털과 콘텐츠업체간의 이같은 짝짓기는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볼 때도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인터넷 경제의 발전에 따라 자연스레 나타나는 하나의 대세다.

하지만 국내 인터넷 기업들이 앞다퉈 M&A전쟁에 뛰어드는데는 우리만의 또다른 이유가 있다. 우선 최근 급작스레 많은 돈이 인터넷 벤처기업들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용을 써 봐도 10억원밖에 매출을 내지 못하는 기업에 만약 1백억원이 투자됐다면 어떡할 것인가. 빠른 시간내에 투자에 대한 이익을 내줄 것을 기대하는 투자자들이 눈에 힘주고 있는 이상 경영자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익을 기대하고 들어온 투자자금인 이상 일정 부분 이익을 실현시켜줘야 하는 것이 경영자의 입장이다. 결국 자금의 안전한 분산이라는 차원에서도 ‘잘 나가는 기업’하나를 잡아 합병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대안이 되는 것. 매출 실적이 좋은 기업을 잡아 수익기반을 튼튼히 하는 것이 자사의 매출을 갑자기 높이는 것보다 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금력이 확보된 이상 스스로 고생해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기보다 이미 기술을 갖고 있는 기업을 사버리는 것이 자본의 논리상 더욱 효과적인 일이기도 하다.

물론 이처럼 넘쳐나는 자금 덕에 ‘기업 쇼핑’에 나설 수 있는 회사가 많은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자신들이 갖지 못한 훌륭한 기술을 가진 기업과 몸을 섞어 새로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M&A를 추진한다. 인터넷망 사업자인 두루넷이 최근 통신서비스업체인 나우콤을 인수한 것이 그 예다. 나우콤이 제공하는 나우누리 서비스의 풍부한 콘텐츠와 커뮤니티를 확보함으로써 경쟁사인 하나로통신이나 드림라인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핵심 역량을 기반으로 자신들보다 우수한 기술을 가진 업체와 연계함으로써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이른바 ‘연계의 경제(economy of network)
’가 성립되는 예라 할 수 있다.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M&A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는 않다. 이는 다분히 M&A에 대한 ‘체질적 거부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M&A 당했다’고 흔히 표현하듯 한 기업이 통째로 다른 기업에 먹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리콘 밸리의 벤처기업들의 경우 회사를 어서 빨리 키워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공룡들에게 먹히기를 바라는 것이 꿈인 반면, 우리 벤처기업가들의 열에 아홉은 하루 빨리 회사를 키워 스스로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이 꿈이다. 이런 점에서 ‘아직 우리 풍토에서는 이르다’는 지적도 있지만, M&A에 대한 서로의 입질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면 어떤 기업들이 합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 지식경영연구소 윤준수 소장은 “서로 다른 영역의 1위 기업끼리 합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이른바 BOB(Best of Best)
모델이다. 그는 또한 “동일한 사업영역에서라면 합병 대상 1순위는 3등 기업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1등과 2등이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서로 합치기를 기대하기는 무리다. 이 상황에서 1, 2등이 힘겨루기를 할 때 가장 군침도는 먹이감은 다름아닌 3등 기업인 것. 3등을 누가 잡느냐가 판세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윤소장은 “1등을 못할 바엔 차라리 3등을 하라”라고 충고했다.

김승렬 기자 <이코노미스트 제5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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