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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올림픽 ‘서막’으로 출발, 1회 땐 올림픽 명칭도 못 써

중앙선데이

입력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단체전 우승을 차지한 한국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하지만 직후에 열린 남자 1500m 경기에서 김동성이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에 말려 1위를 하고도 실격당하는 바람에 분위기는 급랭했다. [중앙포토]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겨울올림픽은 동계 스포츠의 꽃이고 백미다.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돼야 겨울올림픽을 치를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겨울올림픽은 고급 스포츠 이벤트다. 겨울올림픽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고, 현장의 열기와 치열한 경쟁은 어느 정도일까.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2006년 토리노 대회에서 각각 금 1, 은 1개씩을 따낸 ‘쇼트트랙의 지존’ 최은경(27)씨가 중앙SUNDAY 독자들을 겨울올림픽의 세계로 안내한다. 최씨는 현재 한국체대 박사과정에서 스포츠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초기엔 여름 대회 개최국에 우선권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올림픽 경기대회 이후 28년 만에 겨울올림픽이 시작됐다. 제8회 파리 올림픽의 일부로서 진행된 것이다. 1924년 1월 25일부터 2월 5일까지 프랑스 샤모니에서 열렸다.

겨울올림픽의 별도 개최는 1921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결정됐다. 그전까지 아이스하키와 피겨스케이팅이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 큰 인기를 끌고 있었기에 겨울올림픽의 탄생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스키 노르딕 대회를 개최하고 있었던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들의 반대에 부닥쳤지만 IOC의 중재로 타결됐다. ‘여름올림픽의 서막으로 겨울 대회를 개최한다. IOC가 주관하되 올림픽이라 칭하지 않는다’는 타협안이 통과된 것이다. 이에 따라 1회 대회는 올림픽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국제겨울스포츠주간(The International Winter Sports Week)’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경기는 스키·스케이트·아이스하키 등 5개 종목이 열렸다. 첫 대회라 규칙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 하지만 선수들은 올림픽 정신을 준수해 대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1924년 프랑스 샤모니에서 열린 제1회 겨울올림픽 아이스하키 장면. [중앙포토]

이후 IOC는 샤모니 대회를 제1회 겨울올림픽으로 인정했고, 차후 대회들은 여름올림픽과 같은 해에 실시하고, IOC가 개최국을 지정하되 여름올림픽을 개최하는 나라에 우선권을 주기로 했다. 현재는 여름올림픽과 겨울올림픽이 2년 주기로 번갈아 열린다.

겨울올림픽은 유럽·미국 등 선진국들이 즐기는 고급 스포츠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는 모굴스키, 하프파이브, 스키점프, 스노보드 등 젊은이들이 즐기는 종목이 대거 편입돼 저변을 넓히고 있다.

대한민국은 48년 생모리츠(스위스) 대회에 처음 참가했다. 88년 캐나다 캘거리 대회에서는 당시 시범종목이었던 쇼트트랙에서 금 2개를 따냈다. 이후 쇼트트랙은 92년 알베르빌(프랑스)에서 금 2개를 시작으로 지난해 밴쿠버 대회까지 금 19개, 은 10개, 동 7개를 획득해 겨울스포츠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 왔다.

한국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를 기점으로 스피드스케이팅과 스키점프에서 가능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010년 밴쿠버에서는 피겨의 김연아, ‘빙속 3총사’ 모태범-이승훈-이상화가 금메달을 따냈다. 우리나라가 쇼트트랙 강국에서 이제는 겨울 스포츠 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맥도날드 공짜…하지만 그림의 떡
겨울올림픽이 개최되는 도시는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다. 거리는 올림픽을 알리는 문구와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해 ‘세계인의 축제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경기장과 훈련장, 올림픽선수촌 입구에는 철저한 보안 시스템을 작동한다. 선수들의 안전과 휴식을 보장하기 위해 미디어의 출입도 제한한다.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다. 하루 종일 일을 하면 힘들 법도 한데 항상 선수들을 보면 환하게 웃어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통역을 담당하는 자원봉사자들은 올림픽이 끝날 때쯤이면 어느새 선수단과 정이 들어 서로 e-메일을 주고받으며 연락을 이어가기도 한다. 2006년 토리노 대회 때 올림픽 선수촌을 산책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 때 대한민국 선수단 통역을 맡았던 그 자원봉사자였다. 4년 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잊지 않고 환영해 주는데 너무나 반가웠다.

올림픽 선수촌 식당은 항상 열려 있고, 공식 후원사인 맥도날드 부스가 따로 설치돼 있다. 덕분에 선수들은 마음껏 음식을 먹고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여자 선수들은 출입을 할 수 없었다. 기름기가 많은 음식을 먹으면 컨디션과 체중 조절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코치들이 출입을 못하게 한 것이다. 마음껏 맥도날드를 이용하는 남자 선수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경기 전날 맥도날드 부스 앞에서 중국 여자 선수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햄버거를 봉투에 담아 가고 있었다. 그때는 부러운 마음보다 ‘그래, 많이 먹고 컨디션 뚝 떨어져라’는 생각만 들었다.

한국 쇼트트랙은 모든 팀들의 관찰 대상이다. 연습링크에서 훈련을 하려 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중국·캐나다·미국 지도자들이 나타나 우리의 훈련을 지켜본다. 그러면 우리는 힘들어도 안 힘든 척, 또는 안 힘들어도 힘든 척 연기를 하곤 했다. 한번은 메인링크에서 연습을 하려는데 중국 선수단이 우리를 뒤따라왔다. 우리는 능청스럽게 경기장의 천장도 올려다보고,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그랬더니 중국 선수들도 우리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다른 나라 지도자가 연습장에 찾아오는 것은 우리의 전략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선수들의 기록을 체크하고 비디오에 훈련 장면을 담아간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전략이 다 들통나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 앞에 서서 찍지 못하게 하거나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오노 사건 땐 금 딴 뒤 숙소 가서 환호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 때였다. 여자 3000m 단체전 결승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선수 기용과 창의적인 전략으로 1위를 차지했다. 꿈에도 그리던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메달 세리머니를 하기 위해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순간에도 이게 꿈인가 싶었다.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잠시. 이어진 남자 1500m 결승에서 안톤 오노(미국)의 ‘할리우드 액션’ 사건이 발생했다. 1위를 하고도 억울하게 금메달을 놓친 김동성 오빠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만 마냥 좋아하는 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경기장에서는 좋아하지도 못하고 숙소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지르며 마음껏 기쁨을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노력하고 최고의 준비를 한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주는 선물”이라는 말을 한다. 완벽한 준비를 해도 운이 따라 주지 않거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솔트레이크시티 대회 쇼트트랙 남자 1000m 결승에서 스티븐 브래드버리는 호주에 사상 첫 금메달을 안겼다. 그는 8강-준결승-결승까지 3경기 연속으로 앞선 선수들끼리 부딪쳐 넘어지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1등을 했다. 사람들은 그를 ‘역대 올림픽 최고의 러키 가이’라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러키 가이에게도 불운의 시절은 있었다. 94년 릴레함메르 대회 때 그는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예선 탈락을 했다. 게다가 2000년에는 훈련 도중 목뼈 골절로 선수생활에 치명적인 위기를 맞았지만 이를 극복했다. 이처럼 올림픽 금메달은 끊임없는 노력과 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뒤에 하늘이 내리는 선물이 아닐까 싶다.

나는 2006년 토리노 대회 전 심한 부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든 다시 한번 올림픽을 나가기 위해 4년을 고생했는데 그 꿈이 날아가 버릴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대회 3개월 전부터 정상적인 훈련을 시작해 토리노로 갈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어서 가족들이 간절히 보고 싶고 투정도 부리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첫 경기가 있던 날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친언니가 경기장을 찾아왔다. 언니의 얼굴을 보고는 싶었지만 경기 때문에 목소리만 듣고는 경기에 출전했다. 1500m 결승에서 은메달을 따낸 뒤 관중석에 있는 언니에게 달려갔다. 그동안의 힘들었던 시간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펑펑 울었다. 시간이 지나고 언니가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해주는데 정말 서럽게 울었단다. 평창 유치가 확정된 순간 이건희 회장님을 비롯해 유치단이 흘린 눈물도 나처럼 ‘감격+안도+허탈’에서 나온 게 아니었을까. 더반의 눈물이 2018년 평창에서 이어지길 기원한다

최은경 한국체대 스포츠심리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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