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비, 세찬 바람 맞으며 청년들은 순수를 노래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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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호 10면

비바람, 폭풍우라는 말이 결코 좋은 느낌을 주는 말이 아닌 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인간 세상에서 ‘비’란 고통과 고난, 억압 등을 상징하는 말로 오랫동안 자리 잡아 왔다. 식민지 시대의 슬프고 청승맞은 대중가요에서 ‘궂은비’가 등장하는 것은 결코 희한한 일은 아닌 것이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17> 포크송이 바라본 1970년대

청년문화 시대의 젊은이들이 따뜻한 실내에서 유리창 밖으로 비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젊은 혈기에 가끔 비를 맞아도 갈아입을 옷 한 벌쯤은 있었던 시대가 됐을지라도, 역시 비란 춥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특히 거기에 ‘바람’이 결합되어 ‘비바람’이나 ‘폭풍우’가 된다면 더더욱 힘들고 고통스럽다.
흥미로운 것은 대중가요 가사에서 비와 비바람을 고통의 의미로 쓴다는 점이 아니라 1970년대 포크송이 그 고통의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1.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 (후렴)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2.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음 어디로 가야 할까/ (후렴)”(양희은의 ‘아름다운 것들’, 1972, 방의경 작사, 외국 곡)

70년대 초에 사랑 노래도 아닌 이런 노래가 대중가요로 인기를 모았다. 분석을 하며 따져보아야만 의미를 알 수 있는 가사인데 이런 노래를 그토록 많은 사람이 즐겼으니, 생각해보면 참 희한한 세상이었다. 이 노래에서는 ‘빗줄기’와 ‘바람’이 몰아치는 험한 세상 속에 ‘작은 이슬방울’과 ‘가엾은 작은 새’가 위태롭게 놓여 있다. 그것들은 꽃잎 끝에 위태롭게 달려 있고, 엄마도 없고 다리도 없어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들. 그러나 맑고 어린 순수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순수하고 맑으나 연약한 존재들을 비바람 부는 세상은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들은 위태롭고, 비바람 부는 세상은 폭압적이다.

사실 기성세대들은 이런 존재들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식민지와 전쟁, 이농과 산업화 드라이브 등 어른들은 약한 것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약육강식의 세상을 살아왔다. 아침이슬의 순수함을 세상이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배고픈 줄 모르고 살아온 철딱서니 없는 젊은 것들의 낭만’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궂은비’가 내리면 그 고통을 ‘내 운명이려니’ 하고 꾹꾹 눌러 참고 혼자 흐느껴 울 뿐이었다. 그게 바로 트로트의 정서였다.

하지만 포크는 달랐다.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그 속에서 ‘여기 가엾은 작은 새가 있어요’ 하고 외치거나, ‘작은 이슬방울을 위태롭게 하는 비바람은 억압적이에요’, ‘나는 비바람을 맞더라도 작은 새처럼 순수하게 살 거예요’ 하고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태도였던 것이다. 위의 ‘아름다운 것들’의 가사를 지은, 당시 이화여대 학생이었던 방의경은 여성으로서는 매우 드문 비판적 포크 싱어송라이터였다. 그는 자작곡 ‘불나무’(1972)에서 ‘산꼭대기 세워진 불나무에 밤바람이 찾아와 덮어버리고 결국 그 순수한 열정인 불꽃송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고 노래한다. 시종일관 비바람에 위협받는 순수한 존재들에 대해 노래하는 것이다.

한국 비판적 포크의 최고봉인 김민기(사진)의 노래에서도 이런 상징은 자주 등장한다.
“1. 어두운 비 내려오면 / 처마 밑에 하나이 울고 서 있네 /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2. 세찬 바람 불어오면 / 벌판에 하나이 달려가네 / 그 더운 가슴에 바람 맞으면 /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현경과영애의 ‘아름다운 사람’, 1974, 김민기 작사·작곡)

발표 당시에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으나, 이후 권진원, 나윤선 등 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한 노래다. 가사에서 ‘하나가’라고 쓰지 않고 ‘하나이’라고 쓴 것이 흥미롭다. 국어시간에 배운 고어(古語)적인 표현을 써서 노래 전체에 ‘먹물 기’를 듬뿍 드리운다. 인간이란 존재가 언제 가장 아름다울까. 그에 대한 이 노래의 답변은 ‘어두운 비’와 ‘세찬 바람’ 속에서 맑은 눈물과 더운 가슴을 잃지 않을 때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비겁하게 무릎 꿇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나마 자신의 자존을 잃지 않고 순수함을 지켜나갈 때에 인간은 아름답다. 아니, 바로 인간만이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란 아름다운 존재인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보면 세상에 고개 빳빳이 들고 순수를 고집했던 태도는, 어찌 보면 어른들 말마따나 철딱서니가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자기 한 몸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에서 이 ‘웬 오지랖’이고 ‘잘난 척’이란 말인가.

“비 오는 저녁 홀로 일어나 창밖을 보니 / 구름 사이로 푸른빛을 보이는 저 하나밖에 없는 등불을 / 외로운 나의 벗을 삼으니 축복받게 하소서 / 희망의 빛을 항상 볼 수 있도록 내게 행운을 내리소서 / 넓고 어두운 세상에서 길고 어두운 여행길 너와 나누리 / 하나의 꽃을 만나기 위해 긴긴 밤들을 / 보람되도록 우리 두 사람은 저 험한 세상 등불이 되리”(사월과오월의 ‘등불’, 1974, 백순진 작사·작곡)

사이먼앤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연상하게 하는 이 노래는, ‘옛 사랑’ ‘화’ 같은 사랑 노래를 불렀던 사월과오월의 노래다. 비를 즐기는 말랑한 사랑 노래를 부르는 마음과, ‘비 오는 저녁 홀로 일어나’ ‘저 험한 세상 등불이 되리’라고 노래하는 마음이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았던 시절이, 바로 이 시대였다. 포크는 이런 태도로 노래를 시작했으니, 청년문화의 열기가 다 식어버린 80년대 후반에조차 “바람 부는 언덕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라고 노래한 ‘사랑으로’(1989, 이주호 작사·작곡, 해바라기 노래) 같은 노래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쯤 이야기를 하고 나니 저 뒤에서 마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20, 30대들의 “너나 잘하세요” 하는 비웃음 소리 말이다. 이들 순수의 노래를 부르던 세대들이 중년이 되었건만 여전히 세상은 ‘어두운 비’ 내리고 ‘세찬 바람’ 부는 곳이니, 젊은이들에게 비웃음 당해도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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