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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천의 스케이트, 평창의 봅슬레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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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재숙
문화스포츠 에디터

1960년대 우리나라에도 피겨스케이팅이란 게 있긴 있었다. 이렇게 이상한 표현을 쓰는 이유는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스포츠가 없어도 딱히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우리네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국민 절대 다수가 빈곤에 시달리던 시대에 피겨스케이팅은 가위 꿈과 동화의 세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70년대 중반까지도 우리나라에 실내 아이스링크는 동대문스케이트장 하나뿐이었고, 한겨울이 아니라면 그 한곳에서 모든 피겨 선수와 아이스하키 선수들이 복작거리며 훈련을 해야 했다. 하물며 스키? 기억에 없다. 아마도 강원도에서는 탔겠지 싶다.

 60년대까지 춘천의 공지천이 스피드스케이팅의 본산과도 같았다. 나중에야 태릉에 국제 규격의 아이스링크가 생겨났고, 이 아이스링크는 후일 지붕을 씌우면서 실내 링크로 변모했다.

 그리고 생각나는 것은 이웃 일본의 삿포로다. 98년 나가노보다 훨씬 앞서 이미 72년에 일본은 겨울올림픽을 개최했다. 북한의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은메달리스트 한필화와 남쪽 오빠의 상봉 스토리가 벌어진 곳 또한 90년 겨울 아시안게임이 열린 삿포로다. 64년에 도쿄 여름올림픽을 개최한 일본이 그 후 불과 8년 만에 겨울올림픽까지 열었으니 그 밭은 일정은 정치적인 상징성을 띤 동시에 당시 일본의 경제발전 속도를 표상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마침내 우리도 겨울올림픽을 가져왔다. 88년 여름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열게 된 겨울올림픽이니 그 길어진 간격이 조금은 야속하기도 하지만 세계 스포츠의 4대 이벤트를 모두 여는 여섯 번째 나라가 되었다지 않는가. 독일과 프랑스·이탈리아·일본·러시아가 몇 안 되는 우리의 선배 격이다.

 옛날 그곳 공지천에서는 스피드스케이팅 경기를 어떤 식으로 벌였을까. 궁금하다. 혹시 타원형 트랙을 조성할 수가 없어서 그냥 내리 직선 코스로만 달렸을까. 예의 동대문스케이트장 얼음판 위에는 왜 늘 물이 흥건했는지. 전기를 아껴야만 했으니 얼음을 땡땡 얼릴 수 없었으리라. 서울 변두리 야외 스케이트장의 역사는 60년대에서 70년대로 이어지는 개발시대의 한 단면이다. 지금은 부도심으로 변모한 미아리나 청량리 같은 곳에는 큰길 뒤편으로 으레 공터가 많았고 겨울에는 그런 곳에 비닐을 깔고 물을 가두어 야외 스케이트장으로 활용했다. 긴 막대기 끝에 매달린 깔때기 모양의 스피커에서는 바로 그 ‘쎄시봉’의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스케이트장은 이듬해 겨울엔 으레 사라지고 없었다. 서울은 계속 넓어지고 공터는 집으로 메워져 갔으니 나중엔 스케이트를 타러 의정부 근처까지 가야만 했다. 그 후 아파트촌에서 쉽게 실내 링크를 보게 될 때까지는 일종의 에어포켓에 빠졌다고나 할까, 아이스 스케이트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멀어져 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새로이 등장한 쇼트트랙이 우리의 즐거움으로 되었고, 나중에는 김연아라는 세기의 스타가 출현해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러곤 결국 세계 겨울 스포츠의 제전을 평창으로 가져온 것이다.

 언젠가 봅슬레이라는 종목에 적도의 나라 자메이카의 선수들이 출전해 지구인들에게 유쾌한 감동을 선사한 적이 있지만, 겨울 스포츠라는 것은 본시 인류문명이 번성한 북반구 이북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이 우리나라와 같은 발전을 일구어낸다 하더라도 겨울올림픽 유치는 영원히 불가능할 테니 이래저래 우리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여름올림픽에서 승마와 같은 종목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이색적인 즐거움이듯, 겨울올림픽에서는 봅슬레이와 스키점프·크로스컨트리·바이애슬론 같은 낯선 설상(雪上) 경기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쁨이 있다. 빙상(氷上) 종목에 쏠려 있는 한국의 겨울 스포츠가 7년 뒤에 얼마나 다채로워질지 상상하니 그 주역이 될 젊은이들의 얼굴이 벌써 그립다.

정재숙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