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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IT 강국인 걸 애써 무시하는 정치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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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허진
경제부문 기자

정보기술(IT) 선진국은 시동을 걸고 있는데 한국은 꿈쩍도 안 하는 일이 있다. 공직선거에 전자투표를 도입하는 일이다.

 지난 3일 한나라당의 새 대표를 뽑는 선거인단 투표에서 전국 단위의 전자투표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실시됐다. 장마철 집중호우 탓에 선거인단 20만3518명 중 5만2809명만 참여해 투표율(25.9%)은 저조했다. 하지만 전국 251개 투표소(터치스크린 방식 투표기 753대, 선거명부 검색단말기 502대)에서는 별다른 혼란 없이 투표가 잘 마무리됐다. 투표 결과는 휴대용 저장장치(USB)에 봉인돼 서울 전당대회 행사장으로 옮겨졌고, 4일 역시 전자투표로 진행된 대의원 투표와 합산됐다. 개표 과정은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전자투표의 장점은 여러 가지다.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종이투표를 전자투표로 바꾸면 국회의원 지역구 하나에 168억원이 절약된다. 18대 국회 지역구 243개를 전자투표로 바꾸면 4조824억원의 예산을 아낄 수 있다는 얘기다. 개표도 금방 끝낼 수 있다. 지난해 6·2 지방선거에서 3억 장(쌓으면 63빌딩 120배 높이)의 투표용지를 썼다. 그러느라 수십 년 자란 나무 8060그루가 사라졌다. 유권자 입장에선 전자투표가 민주주의 실현에 더 가깝다. 전산 통합명부를 이용하면 지정된 투표소가 아닌 곳에서도 투표가 가능해 ‘소중한 한 표’ 실현이 보다 편리해서다.

 전자투표는 이미 세계적 추세다. 미국·프랑스·브라질 등은 대선에서 전자투표를 부분 도입했고, 필리핀은 이미 완전 전자투표로 대통령을 뽑았다.

영국·독일·일본 등 선진국도 각종 공직선거에서 전자투표가 종이투표를 대체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05년 중앙선관위가 전자투표시스템을 개발한 이래 각종 정당·조합장 선거 등 500여 차례 이상 전자투표 경험을 쌓았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전자투표시스템은 인도네시아 수출까지 시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전자투표 방식에 손사래를 치고 있다. 당내 경선에선 전자투표를 잘만 사용하면서 대선·총선 등엔 시기상조란다. 투표 방식이 바뀌게 되면 이해가 갈릴까 봐 각 정당이 아예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IT 강국인 걸 정치권만 무시하고 싶은 모양이다.

허진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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