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erge] 감시자는 누가 감시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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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들 사이의 백로처럼 돋보이는 시민 단체의 도덕성은
높이 평가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충정과 선의가 있다고 해서
자의성과 독선까지 면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13 총선을 앞두고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선거혁명을 일구어 내겠다는 일념으로 경실련이 공천 부적격자 명단을 공개한 이래 총선시민연대와 정개련도 각각 공천반대자명단과 ‘유권자가 알아야 할 15대 국회의원 명단’을 발표했고 다른 시민단체들도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시민단체의 이러한 움직임이 노동단체 이외의 다른 단체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선거법 87조에 대한 불복종운동임에는 틀림없지만, 대통령이 선뜻 시민단체의 선거개입을 ‘시대의 흐름’으로 지지하고 나서고 여당은 물론 야당도 그 결과를 부분적으로나마 공천과정에 반영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상, 일찍이 실정법 위반으로 옥고와 치욕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간디나 서로우Thoreau 및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의 시민불복종운동에 서려 있었던 비장함은 없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시민불복종운동에는 “악법도 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가 격렬한 쟁점으로 불거지기 마련인데, 이번에 이 명제가 이슈화조차 되지 못한 이면에는 정치권 자체가 초래한 귀책사유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보스 위주의 정당정치와 하향식 공천제도, 식물국회와 방탄국회, 정치개혁보다 정치개악을 일삼는 정치권에 대한 총체적 불신이야말로 한가하게 악법논쟁에 매달리기보다는 시민단체의 ‘불법적인’ 정치인 퇴출운동을 화끈하게 밀어주자는 여론의 형성계기가 된 셈이다.

즉 낙천낙선운동의 압도적인 지지여론에는 정치의 썩은 환부를 도려내라는 시민들의 추상같은 명령과 간절한 염원을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이 사실에 주목하면서 정치의 오래된 썩은 환부를 도려내고자 정치적 수술의사가 되기를 작심한 시민단체에게 “의사여, 부디 그대 스스로의 병부터 고치라”하는 냉소적 차원에서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니, ‘명망가 위주의 엘리트운동’이니 하며 비난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힌다.

시민단체들이 벌이는 이번 낙천낙선운동에 관한 한, ‘시민있는 시민운동’임이 확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오랫동안 의정활동의 ‘감시자’로 자리매김해온 시민단체의 위상을 감안하면, “감시자는 누가 감시할 것인가quis custodiet custodes ipsos”라는 물음을 회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그 동안 시민단체들은 소중한 시간과 정성을 투여하며 의정활동을 감시해 왔고 때로는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의회민주주의라는 공공재 산출을 위해 헌신해왔다. 하지만 원론적으로 의회정치가 책임정치라는 점을 감안할 때 국회의원은 과연 누구에게 책임을 지는 존재인가 하는 화두를 이 시점에서 던질 필요가 있다. 다원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민주사회에서 시민단체들만이 국회의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특권적 존재는 아니다. 일반 이익단체나 사회집단도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민주정치를 ‘정치시장’의 범주로 접근한 슘페터Schumpeter의 통찰이 유의미하다면, 이익단체라고 하여 ‘정치적 생산자’인 국회의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자격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공익뿐 아니라 사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의 정당성을 인정하는데 인색치 않은 사회가 민주사회가 아니겠는가? 여성단체들도 여성차별법을 제정하는 데 한몫을 한 국회의원에게 준엄한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의사단체나 약사단체도 각기 자신들의 이익제고에 소극적인 국회의원들에게 거부권을 행사할 만하다.

물론 한 이익단체만이 독점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면 심각한 문제가 되겠지만, 다수의 이익단체들이 경합하는 이상, 공익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다. 사익의 경쟁이야말로 카오스chaos의 상태가 아니며, 공익이 출현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필요조건은 된다. 사익과 공익의 연계고리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에서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민주사회에서 공익은 결과적으로 혹은 사후에ex post 나오는 것이지, 사전에ex ante 혹은 선험적으로

a priori 규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발견의 범주가 아닌 결집의 범주로서 공익을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혜택이 분리가능한 私益에 집착하는 이익단체에 비하여 혜택이 분리불가능한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민단체의 위상은 ‘까마귀들사이의 백로’처럼 돋보이는 것은 사실이며, 이 점에서 시민단체들의 도덕성은 높히 평가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시민단체들의 목소리는 존중되어야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국회의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리는 충분하다. 그들의 의로운 목소리가 ‘사막에서 부르짖는 소리’처럼 외로운 목소리가 되서야 하겠는가!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시민단체도 민주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임의 단체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 정치인들의 평가를 독점하거나 모든 유권자들의 의견을 대표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시민단체들만이 의정활동평가를 독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면, 시민단체에 의해 ‘낙선대상’으로 낙인찍힌 의원이 다른 사회단체에 의해 ‘당선대상’으로 선정될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두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시민단체들이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리는 최종 권한을 가진 정치적 의사처럼 행동하거나, 낙선대상의원에 대하여 “정의의 칼을 받아라”하고 외치거나 혹은 “세상에 종말이 오더라도 정의가 이루어져야한다fiat justitia pereat mundus”고 부르짖으며 정의의 사도처럼 군림하는 태도는 부당하며, 자신들 평가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허함이 요구된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비록 퍼포먼스 수준이기는 하지만 낙천대상 정치인들을 분리수거 쓰레기통에 담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입법활동 가운데 입법자의 소신이 존중되어야하는 영역이 엄존하고 있음에 주목해보자. 엇비슷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대안들이 치열하게 경합하는 이른바 ‘가치의 不計測性incommensurability of values’경우가 전형적이다. 이 경우에는 ‘선과 악’의 다툼이 아니라 ‘선과 또 다른 선’의 다툼의 성격이 현저한데, 선과 선이 다툴 수 있다는 현상은 얼핏 괴이쩍게 여겨질는지 모르나, 여성들의 美人대회나 여신들의 美神대회를 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미인대회에서 입상을 다투는 미인들의 경쟁이 불꽃튀는 경쟁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참했던 트로이 10년 전쟁이야말로 탁월한 미모를 갖춘 미신들, 즉 헤라와 아테네 그리고 아프로디테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경합의 결과가 아니었던가?

가치의 불계측성 영역을 감안할 때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르의 판단은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독일점령하의 어느 날 파리의 한 청년이 조언을 구하기 위하여 사르트르를 찾아왔다. 그의 고민은 레지스탕스운동에 참여할 것인지 혹은 늙은 어머니를 모실 것인지, 양자택일의 문제였다. 문제의 상황은 忠의 가치와 孝의 가치가 경합하는 형국으로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울고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우는” 상황에 비견될 만큼 심각한 선택의 딜레마 상황이었던 셈이다. 이에 대한 사르트르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어떤 대안을 선택해도 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 경우 두 가지 대안의 가치는 엇비슷한 것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제안이 설득력을 가진다면, “아내도 옳고 며느리도 옳고 혹은 하녀의 의견도 옳다”는 황희 정승의 접근방식에 수긍할 수 있을 듯하다.

실상 우리 입법자들에게 있어 ‘선과 또 다른 선’과의 다툼으로 투영되는 경우는 국가보안법 개정문제, 동강댐 건설문제 등 적지 않다. 국가보안법의 경우 국가의 안보와 인권의 가치가 경합하는데, 양자는 공히 정당화될 수 있는 가치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사안들은 미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묵은 논쟁, 즉 총기판매 찬반논쟁 혹은 임신중절 찬반논쟁, 안락사 논쟁, 사형제도폐지 논쟁 등의 범주를 방불케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범주의 사안이라면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직접 가늠하기보다는 유권자들 판단의 몫으로 남겨두는 편이 타당하다.

경합적인 가치갈등의 사안에서조차 입법자로서 국회의원의 재량권을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반환경주의자’, ‘반인권주의자’ 혹은 ‘반민주주의자’ 등으로 매도한다면, 모든 갈등을 ‘선과 악’의 다툼으로만 파악했던 고대 마니교도들의 경직된 태도와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이와 연장선상에서 시민단체에게는 자신들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는 입법자들에 대하여도 관용의 태도가 요구된다는 점을 각별히 강조하고자 한다. 유달리 우리 시민단체들은 정치·사회·경제 각 영역에서 개혁을 강조해왔고 따라서 ‘개혁’과 ‘반개혁’의 이분법을 선호해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개혁’처럼 耳懸鈴鼻懸鈴이현령비현령으로 남용되고 있는 개념도 드물다.

그 결과 ‘개혁’의 개념은 이모티비스트들emotivists의 지적처럼 사실적 내용보다 감정을 표현하는 가치평가적 어휘로 전락하였다. 즉 자신이 좋아하면 ‘개혁’이 되고 좋아하지 않으면 ‘반개혁’으로 부각되는 식이다. 이 경우 ‘탈세’나 ‘절세’의 차이 혹은 ‘로맨스’와 ‘不倫’의 차이 만큼이나 주관적이다. 즉 “내가 하면 절세”고 “남이 하면 탈세”이며,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 된다면, 과연 양자를 가늠하는 객관적 잣대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시민단체들이 즐겨 사용하는 ‘개혁’이라는 잣대가 이모티비스트들이 주장하는 호·불호의 차원을 넘어 명실공히 객관적 잣대가 될 수 있는지가 불명확한 상태에서 특정법안의 개혁성 여부는 쟁점이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개혁입법’에 반대한다고 해서 반개혁적 의원이라는 판정을 내리는 일도 자의성을 노정하게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시민단체들이 낙천낙선 대상자 선정에서 적용하고 있는 기준의 공정성에 대하여 지적할 필요가 있다. 공정성의 절차적 기준과 관련하여 롤즈J. Rawls의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은 매우 인상적이다. ‘무지의 베일’이란 당사자가 모든 이해관계에서 비교적 완벽하게 차단된 상황을 의미하며, 이러한 상태에서 결정에 임할 때 그 결정은 공정한 결정이 되리라는 것이 순수 절차적 정의pure procedural justice에 대한 롤즈의 견해이다. 이 점에서 성가수녀원에 들어가 합숙을 하는 등, 시민단체들이 공정성 확보를 위해 노력한 사실은 인정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정도의 절차만으로 공정성 확보에 충분한 ‘무지의 베일’을 쓴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오이밭에서 신발끈을 매지말라”는 준칙을 상기할 때 음모론이나 청와대와 시민단체간의 커넥션 등의 논란이 불거져 나온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물론 시민단체들은 천부당 만부당하다고 펄쩍 뛰고 있지만, 논란의 대상이 된 사실 자체만으로도 공정성에 흠집이 생긴 셈이며, 혹은 적어도 ‘부덕의 소치’라고 자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편 이보다 심각한 사안은 시민단체들이 낙천낙선과 관련하여 원용하고 있는 실질적 기준에 관한 문제이다. 우선 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는 정치인을 낙천대상자로 분류했는데, 스스로 악법에는 불복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시민단체들의 입장에서 당사자들이 보복사정이나 ‘끼워넣기’식 사정으로 억울하게 당했다고 항변하는 경우 어떠한 답변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검찰에서 기소유예되거나 혹은 법원에 의하여 무죄판결을 받은 사람 혹은 대통령에 의하여 사면복권된 사람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일단 한번 부패혐의를 받거나 잘못한 사람은 법원판결이나 사면과 관계없이 영원히 정계에서 추방되어야 할 것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법을 어기고 부정부패에 연루된 사람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만 선정된 이유는 무엇이며, 이들이 “왜 하필 나만 대상자가 되었는가”하며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면,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또한 국회의원은 평가하면서 왜 정당이나 공천권을 가진 정당의 보스들은 평가하지 않는가? 국회의원들 개인에게만 국한시켜 평가하는 방식이라면, 한국의 전근대적인 정당구조에서 볼 때 “나무를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단견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하여 시민단체들이 억울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적지 않겠지만, 문제의 핵심은 실질적 기준이 분명하고 투명할 때 혹은 법치국가의 기준에 부합하고 다원주의 사회에 맞으며 또한 드높은 이상 못지 않게 현실정치의 복잡성을 가늠하는 정교한 정치적 판단이 선행될 때, 비로소 유권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부패정치인의 물갈이 시도는 시민단체가 처음이 아니다. 6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이미 집권군부세력에 의한 인위적인 물갈이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 실패로 돌아간 이유는 결국 유권자들이 정치적 박해로 간주하고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많은 부패정치인들은 나자로처럼 정치적 죽음에서 부활했다. 물론 시민파워는 군인파워와는 다르기 때문에 일정한 도덕성과 실효성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나, 기준자체만을 놓고 보면, 당시 군인들의 기준과 오늘날 시민연대의 기준이 어떻게 다른지 분명치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낙천낙선운동에 나서는 시민단체들의 충정과 선의까지 의문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충정과 선의가 있다고 해서 자의성과 독선까지 면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도덕적 정당성을 담보받아 명실공히 ‘죄와 벌’이 연계되는 낙천낙선운동이 되려면, 자의성과 독선의 요소가 최소화되는 공정한 기준의 설정이 선결조건이다. 만일 시민단체들의 퇴출판정을 당사자들이 정치적 음모로 되받아 치고 이를 유권자들이 수용하면서 낙선대상으로 선정된 의원들이 선거에서 뽑히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유권자의 어리석음으로 치부하고 지역감정의 분출로 자위하겠는가? 결국 시민단체들이 표방하는 가치관과 상이한 철학을 가진 입법자도 모범적인 입법자로 선정될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되지 않는 한, 일원주의 사회보다 다원주의 사회에 부합하는 기준이 설정되지 않는 한, 또한 오늘의 복잡한 정치적 현실을 치밀하게 조망할 수 있는 정교한 기준이 강구되지 않는 한, 시민단체들의 지나친 청교도적 접근방식은 역풍을 받아 자칫 원래의 목표달성도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으며, 그 결과 선거민주주의 정착에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 박효종/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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