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찾아 떠나는 최고두뇌들…"당신도 옮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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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농경민과 유목민이다.

얼마 전까진 농경민의 시대라면 지금은 유목민의 시대다.”한 컨설턴트는 전직(轉職)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직장을 몇 번이고 옮겨다녀도 흉이 되지 않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더불어 벤처라고 하는 황금의 땅도 열리고 있다. 비(非)
벤처에서 벤처로, 이 벤처에서 저 벤처로 옮기는 행렬이 줄을 짓고 있는 것은 이런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그동안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 장소라고 하던 컨설팅펌은 벤처로, 금융계는 외국계 자산운용사로 향하고 있다. 연구소와 대학의 인재들도 대거 움직이고 있다. 최고 두뇌들의 대이동이다. 이런 흐름을 짚어 봤다. <편집자>

지난 연말이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한 컨설팅 회사가 역시 미국의 최고 명문인 스탠퍼드대 경영학 석사(MBA)
2년차들을 대상으로 직업 설명회를 가졌다. 예년 같으면 구름처럼 몰려들어 성황리에 행해졌을 것이다. 아무리 벤처기업이 뜨고 실리콘 밸리로 인재들이 달려간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학생들이 참석하리라고 생각했음 직하다. 그러나 그날 설명을 들으러 온 학생은 단 5명. 이 컨설팅회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곧바로 본사로 가서 내린 첫 번째 결정이 연봉을 17만 달러(약 2억원)
로 상향 조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지난해 미국의 월스트리트는 사상 최대의 돈 잔치를 벌였다. 덩달아 월가의 연말 보너스도 98년보다 20% 늘어난 1백30억 달러 정도였다. 당연히 월가의 사람들은 기뻐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월가가 더 이상 최고의 대우를 해 주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월가에선 한 투자은행에서 정보통신담당 분석가로 일하다 애컴니 테크놀러지라는 한 인터넷 회사의 재정담당 이사로 옮겨간, 30대 초반의 티모시 웰러(34)
이야기가 월가를 기죽게 한 것이었다. 웰러는 이 회사에 입사하는 조건으로 주식 1백5만 주를 배당받았다. 자기 돈으로 산 것도 아니었다. 월가 사람들은 “월가에선 뼈빠지게 일해 벌 수 있는 돈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인터넷회사에 들어가 잘만 하면 아들·손자까지 3대가 먹고 살 돈을 장만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너도나도 실리콘 밸리로 몰려가 ‘실리콘 칼라’가 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맥킨지나 A.T.커니, 보스턴 컨설팅, ADL(아서 디 리틀)
등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의 한국지사는 누구나 가고자 원했던 ‘취업 희망 순위 1위’업체들이었다. 명실공히 명성과 부(富)
의 요새였다. 이들 회사의 컨설턴트들은 1억원 전후의 연봉에다 미국 10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최고의 학력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 OPM으로 사업하기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컨설팅 기업에 다니던 ‘최고의 인재’들이 벤처기업으로 몰리고 있다. 직접 창업하기도 하고 좋은 대우를 받고 벤처기업에 취직하기도 한다.

지난 1월 말 보스턴 컨설팅(BCG)
에서 부사장으로 일하던 이재현씨(36)
는 자신이 거느리던 한 팀 4명 전원을 데리고 통신망업체인 두루넷의 부사장으로 옮겨갔다. 영업과 기획, 전략을 총괄한다. 역시 BCG의 컨설턴트인 윤웅진씨도 자산운용사로 자리를 옮겼다.

A.T.커니에서도 여러 명이 나갔다.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 버클리대 MBA 출신인 이승훈씨는 아예 인터넷 회사를 차렸다. 맥킨지와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PWC)
등의 다른 컨설턴트들과 함께 설립했다. 정보통신 전문 컨설팅업체인 ADL은 더 빠른 이직붐을 경험했다. 이미 지난 연초에 시니어 컨설턴트가 자기 팀 전원을 데리고 창업했고 파트너급의 컨설턴트도 지난해 9월 그만뒀다고 한다. 컨설턴트였던 정희훈씨도 인터넷 컨설팅업체인 e-커뮤니티를 아예 차려 지금 사장으로 있다.

물론 컨설턴트들이 컨설팅회사를 떠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젊은 층에서는 1년에 약 20%씩 그만둔다. 처음 분석가(애널리스트)
나 신임 컨설턴트(어소시에이트)
로 와서 3년 내에 절반 정도가 떠난다고 한다. 이어 컨설턴트와 시니어 컨설턴트 등으로 승진하면 또 떠난다. 거의 대부분 파트너가 되기 전에 떠난다고 보면 된다. 일의 강도가 워낙 세기 때문이다. 보통 3일 낮밤을 꼬박 새고 그 다음날 겨우 하루 쉴 정도로 격무다. 다들 이렇게 열심히 한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잘해야, 게다가 아무리 빨라야 7년 정도는 지나야 파트너가 된다.

이 때문에 컨설턴트들은 대개 몇 년 기한 잡고 컨설팅회사에 들어간다. 그러나 지금은 사직 규모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자연히 컨설턴트들의 연봉도 높아졌다. 유명 컨설팅 기업의 컨설턴트 연봉 초임이 지난해까지만 해도 7천만∼8천만원이었지만 최근 1억원 이상으로 상향 조정되었다고 한다. 또 전에는 그만두면 대학이나 대기업 이사, 외국계 기업 최고 경영자(CEO)
로 옮겼지만 지금은 전에는 염두에도 안뒀던, 벤처기업의 CEO로 가거나 아예 회사를 차린다.

수입 때문도 있다. 잘만 하면 평생 벌 돈을 한 순간에 모을 수 있는 스톡옵션 때문이다. 직접 돈을 자신의 회사에 투자할 기회도 주어진다. 이익이 나면 그 배분에 참여할 권리도 주어진다. 그러나 연봉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한다. 헤드 헌터인 유순신 (주)
유니코 써어치 상무는 “벤처기업 CEO로 전직할 경우 대개 연봉 5천만∼8천만원선”이라고 말한다. 다른 이유도 있다. 벤처기업 붐으로 예전보다 젊은 나이에 CEO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대거 생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터넷은 이제 막 떠오르는 성장산업이라는 점 때문이다. 지금 옮기면 계속 CEO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남들보다 하루라도 빨리 벤처기업으로 옮겨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게다가 자기 돈도 아니다. 설사 망해도 아무 부담이 없다. CEO의 경험은 남고 더구나 세계적인 컨설팅회사의 컨설턴트를 지낸 노하우와 기술은 여전하다. 밑져야 본전이다. 요즘 컨설팅업계에서 OPM(Other Person’s Money)
, 즉 남의 돈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 KDI 박사들의 대거 전직

이처럼 컨설턴트들이 대거 떠나다 보니 빈 자리가 많이 생기고 있다. 그 자리를 대학교수나 연구원들이 메우고 있다. 종전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30대 후반∼40대 초반의 인재들도 컨설팅회사에 들어가고 있다. 물론 아무나 들어가지는 못한다. 여전히 미국의 10대 명문 대학 MBA를 받을 만한 실력이 있어야 한다. 영어 역시 능숙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은 완화되지 않았다.

다만 연령이 다소 높아졌다. 최근 컨설팅회사로 옮긴 사람들의 면면이 하나같이 화려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지난 연말과 올 연초에 걸쳐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들이 3명이나 사표를 내고 컨설턴트로 옮겼다. 30대 후반의 강영재 박사와 구본천 박사 그리고 30대 중반의 김승진 박사가 그들이다. 앞의 두 박사는 맥킨지, 김박사는 BCG로 옮겼다. 40명이 조금 넘는 박사들을 거느린 한국개발연구원이 비상 걸릴 정도다. 경제학 박사라면 누구든지 선망하던,‘한국 최고의 경제 싱크탱크’라는 이미지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뿐 아니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고 계명대 교수를 지내다 PWC 전무로 옮긴 최명주 박사는 40대 중반이고,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경제학 공부를 한 후 세계은행 연구원, 삼성생명 부장으로 있다가 올해 A.T.커니의 팀장이자 시니어 컨설턴트로 옮긴 주진형씨도 40대 초반이다. 물론 이들의 자리는 또다른 인재들이 메울 것이다.

컨설팅기업이 벤처기업에 ‘최고’의 자리를 내주면서 ‘최고’의 연구기관과 대학 교수들이 컨설팅기업으로 옮기는,‘최고’들의 자리바꿈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김영욱 기자 <이코노미스트 5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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