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허영호의 각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5면

<결승 1국> ○·구리 9단 ●·허영호 8단

제8보(73~86)=구리와 허영호. 이름이 풍기는 중량감은 크게 다르지만 승부란 치고 올라가는 쪽이 유리하다. 전력이 엇비슷하다면 나이 어린 후배 쪽이 항상 유리한 입장에 선다. 심리학을 잘 몰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눈으로 본 승부는 그랬다. 허영호와 구리의 승부를 3대7이나 4대6이 아닌 45대55나 50대50까지 보는 이유다.

 허영호 8단은 73으로 하나 교환해 놓고 곧장 75를 결행했다. 중앙을 움직일 때부터 노리던 수. 백이 76으로 이으면 77로 양분하여 수세 국면을 단번에 공세로 전환시킨다는 계획이다. 백이 77의 절단을 두려워해 ‘참고도’ 백1로 공배를 잇는 것은 최악이다. 흑은 A로 따내도 두텁지만 2, 4로 젖혀 잇는 게 더 좋다. 따라서 76, 78은 정수이며 이후 84까지 사는 것도 필연이다(귀는 아직 B의 삶이 남아 있다).

 구리 9단은 허리를 잘렸지만 괜찮다는 얼굴이고 허영호 9단은 85로 뻗어 중앙 백 넉 점에 칼끝을 겨눈다. 허영호의 눈길이 좀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 백이 안전권까지 달아나려면 꽤 먼 길을 가야 한다. 그 사이 상변을 굳히고 좌변 백진을 파괴하는 것 ― 그 스토리만 제대로 이뤄지면 바둑은 흑 승이다. 그런데 구리 9단의 다음 한 수가 묘하다. 바로 달아나지 않고 86에 헤딩하고 있다.

박치문 전문기자

▶ [바둑] 기사 더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