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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하게 불어대는 트럼펫 마음의 속살 파고 들 만큼 예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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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호 31면

비밥 재즈의 명인들. 왼쪽부터 찰리 파커(알토 색소폰), 스물둘의 마일스 데이비스(트럼펫), 앨런 이거(테너 색소폰), 카이 와인딩(트롬본). 1948년 뉴욕이다.

재즈의 역사, 그건 마일스 데이비스의 역사다. 과장 아니다. 비밥, 쿨, 하드밥, 모달, 재즈록, 퓨전 등으로 재즈가 전개될 때 마일스는 항상 일송정 푸른 솔의 선구자였다. 아예 장르를 창시하거나 최소한 유행을 선도했다. 비틀스 없는 팝 음악사를 떠올릴 수 없듯 마일스를 빼고 재즈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아울러 마일스는 학교다. 재즈사의 빛나는 존재 대부분이 그와 그룹을 함께하거나 음반 작업을 했다. 스승 격인 찰리 파커를 필두로 길 에번스, 아트 블래키, 텔로니어스 멍크, 존 콜트레인, 레드 갈런드, 캐넌볼 애덜리, 빌 에번스, 소니 롤린스, 허비 핸콕, 키스 자렛, 웨인 쇼터, 존 매클로플린, 마커스 밀러…. 이 이름들로 음반을 모으면 곧장 베스트 재즈앨범 콜렉션이 된다.

詩人의 음악 읽기 마일스 데이비스

따라서 마일스는 매우 뛰어난 재즈 뮤지션입니다고 말하는 것은 한용운, 윤동주, 이육사는 아주 훌륭한 시인입니다고 말하는 것처럼 너무 당연하여 생뚱맞다. 그런데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시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근 사람에게 한용운 등은 선사시대와도 같다. 더 이상 읽고 느끼는 대상이 아니다. 세칭 미래파 동네의 김경주, 황병승, 권혁웅쯤의 ‘당대’이거나 거슬러 올라가도 이성복, 최승자, 기형도를 읽는다. 당연하지. 소설 읽겠다면 김인숙의 신간 미칠 수 있겠니를 사 보지 이광수의 무정을 뒤져 읽겠는가. 그런데 마일스는 다르다. 그는 언제나 ‘당대’로 살아 있고 새로운 음악처럼 듣고 또 듣게 되는 대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윈턴 마살리스를 두고 ‘뛰어난 뮤지션의 지루한 음악’이라고 표현하여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마일스 이후로도 윈턴 마살리스처럼 대단한 연주력을 갖춘 엘리트 뮤지션은 쏟아져 나왔지만 그래 맞다, 지루한 건지 모른다.

고교시절 처음 듣는 순간 탄성
왜 마일스일까. ‘연주를 잘 해서’라는 답이 맞지 않다는 건 그의 음반을 들어보면 곧장 알 수 있다. 어딘지 이상하고 아슬아슬하게 트럼펫을 분다. 사운드머신처럼 잘 부는 재즈맨들은 널렸다. 위대한 음악적 혁신가라 해서 더 사랑받을 까닭도 없다. 그런 건 음악사 책에서나 중요한 문제니까. 대체 왜 마일스일까. 내게는 좀 자랑스럽고 신기한 체험이 있다. 1970년대 중반쯤 서울 광화문 코스모스레코드점에서 최초로 산 재즈 음반이 바로 마일스의 ‘인 유럽’이라는 타이틀의 라이브였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를 고교생 때였는데 처음 들으면서 이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예민하구나.” 그때 이래 몇십 년이 흐르는 동안 ‘예민함’이라는 견해는 수정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1963년도 음반 ‘in Europe’

전 세계 재즈 애호가들이 그처럼 사랑하고 숭배하고 학습의 대상으로 여기는 마일스다. 모든 재즈 서적에서, 구글, 유튜브에서 감당할 수 없이 넘쳐 나는 것이 그에 관한 자료들이다. 거기에 빠져 있는 말을 채워 넣고 싶다. 바로 심리의 속살을 파고드는 예민함. 마일스의 예민함은 트럼펫을 충분히 불지 않는 데서 기인하는 것 같다. 그는 죽죽 뻗어 나게 사운드를 구사하지 않는다. 찔끔찔끔 던지듯 소리를 내다 말고 공연 때는 청중을 등지고 연주하는 때가 많다. 80년대 이후 91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주력한 것이 펑키한 일렉트릭 사운드인데 이때 그는 거의 무대 바닥을 향해 연주하고는 했다. 만년에는 화가를 겸업했는데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예민하고 또 예민한 심리주의적 예술가였다.

보편타당해야 대중성을 갖는다는 통념이 맞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조금만 이상해도 대중성이 없다고 배격하는 우리 문화 풍토에서는 더더욱 생각해 볼 문제다. 늘 음정이 불안한 조니 캐시는 컨트리 음악의 제왕이고 아름답지 않은 목소리의 극치를 달리는 밥 딜런은 주류와 반주류를 역전시켜 버렸다. 빌리 할리데이가 ‘좋은 음성’의 소유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식 오디션 프로그램 기준대로라면 모두 예선 탈락했을 인물들이다. 롤링스톤스의 믹 재거도 펄 잼의 에디 베더도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도 오디션 ‘멘토님’들께 혼쭐만 나고 집에 갔을 것이다.

요즘 청소년 대다수가 연예인을 꿈꾼다고 한다. 왜 그런지 이해한다. 그중에는 예술성을 고민하는 일부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오디션 예선 탈락자들의 세계에 관심을 가져보기 바란다. 마일스처럼 예민하거나 나쁘거나 혹은 멋대로거나, 어쨌든 이상하고 이상한 것으로 행세하는 대중성이 존재한다. 어차피 오디션에 붙을 확률이나 홍대 앞에서 성공할 확률이나 바늘구멍인 점은 마찬가지다. 멘토님께 머리 조아리기보다는 멋대로 한판 놀아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어쩌면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천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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