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집밖 세상이 궁금해, 남장하고 길 나선 조선의 규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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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여행과 동아시아 고전문학
심경호 지음, 고려대출판부
464쪽, 2만3000원

“그날로 남자의 의상으로 갈아입고 행장을 꾸려 동쪽으로 향했다. 나는 바야흐로 이칠(二七)의 나이다. 동자처럼 편발(編髮·뒤로 묶어 길게 땋은 머리)을 하고 교자(轎子·가마) 안에 앉고, 청사(靑絲)의 장막을 빙 두르고는 앞면만 활짝 틔우고 제천 의림지를 찾았다.”

 여행에 나서는 모습이 당당하다. 이칠, 곧 14세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첫 문장에서 눈치 챘겠지만 글쓴이는 여성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여성 김금원(1817~?)의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 한 대목이다.

 김금원은 양반의 서녀였다. 여성의 활동 폭이 극히 제한됐던 시대, 그가 남장을 하고 산수 유람을 떠난 것은 시대를 앞선 도발적 행위였다. 그는 다음 같이 말한다. 남녀의 경계가 사라진 지금에도 울림이 크다.

 “여자의 경우에는 오로지 술과 음식의 간을 맞추는 일을 논할 뿐이다. 규중(閨中)에 깊이 거처하여 스스로의 총명과 견식을 넓힐 수가 없어서, 결국 완전히 잊혀 버림으로 귀결되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모두(冒頭)가 길었지만 이처럼 여행은 사람을 키운다. 동서고금 없이 여행은 성장담이다. 낯선 사물과 풍경에 감탄하고, 평소 게을리했던 자신을 다잡는 계기가 된다. 또 요즘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다닐 수 없던 시절, 여행은 고역이요, 도전이었다.

 고려대 한문학과 심경호 교수가 쓴 이 책의 제목은 학술서적 같다. 하지만 내용은 사뭇 다르다. 한국을 중심으로 중국·일본의 여행기록 20여 편을 쫀득하게 풀어놓는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최부의 『표해록(漂海錄)』.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등등, 근세 이전 동아시아의 풍물과 당대 지식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이 떠났던 행선지를 지도와 표로 친절하게 표기했다. 독자들로서는 과거 우리의 멋과 흥취, 그리고 기개와 모험을 찾아 떠나는 또 한 편의 즐거운 여행인 셈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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