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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손정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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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

1시간 50분의 열띤 프레젠테이션이 끝났다. ‘객석’은 조용했다. 이럴 수야 있느냐는 듯 누군가 박수를 쳤다. 몇몇이 뒤따랐다. 분위기만 더 썰렁해졌다. 옆자리 기자가 내놓고 구시렁댔다.

 “이건 뭐 재미도 없고 알맹이도 없는 걸 횡설수설….”

 2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기자간담회 풍경 한자락이다. 사실 그랬다. 세계적 기업가가 모국에서 연 11년 만의 공식 간담회다. 기자들로서야 큰 제목거리 하나 기대할 만하다. 처음부터 살짝 불안하긴 했다. 주제가 ‘소프트뱅크 30년 비전’이란다. 3년 앞도 내다보기 힘든 세상에 30년이라니. 실제 프레젠테이션은 예서 한참 더 나갔다. 300년. 손 회장은 ‘지금, 여기’보다 300년 후를 얘기하는 데 더 몰입했다. 유독 힘주어 말한 단어는 ‘인간’ ‘행복’ ‘미래’, 그리고 ‘꿈’. 이런 추상적 단어에 현실성을 부여할만한 구체적 방안은 뭐 하나 나오지 않았다. 오죽하면 사회를 맡은 주최 측 인사마저 “야마(기사의 주제를 뜻하는 일본식 은어)가 없다. 알아서 써 달라”고 양해를 구했을까.

 그런데 이상하다.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머리에서 손 회장 얘기가 떠나질 않는다. 지난해 봄, 수십만 일본인을 울렸다는 바로 그 동영상을 미리 본 때문인 듯도 하다. 그가 소프트뱅크 입사 예정자들에게 한 강연 ‘손정의 라이브 2011’이다.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연다.

 “오늘의 테마는 회사 소개가 아닙니다. 제가 무슨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나, 무엇을 이루려 했나, 어떤 뜻(志)을 가지고 있나를 말하려고 합니다.”

 진솔한 토로가 이어진다. 15세, “태어난 이유는 뜻을 이루기 위해서”임을 깨닫는다. 17세, 각혈하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미국 유학을 떠난다. 23세, ‘정보혁명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 뜻을 세운다. 24세, 창업 첫날 귤상자에 올라 달랑 두 명의 직원에게 ‘40년 꿈’을 펼친다. 직원 둘 다 겁먹고 사표를 내버린다. 2년 뒤 ‘5년 시한부’ 선고를 받지만 죽기로 일한다. 44세, 자살행위라는 비난 속에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한다. 49세, 망해가는 보다폰재팬을 인수해 아이폰 돌풍을 일으킨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그를 만든 건 9할이 ‘꿈’이었다. 계산이 안 나오는, 남는 것 없어 뵈는, 미쳤다는 손가락질 받기 딱 좋은 거대한 꿈. 하지만 동영상 속 그는 일갈한다. “이름도 필요 없다, 돈도 필요 없다, 지위도 명예도 다 필요 없다, 그런 멍청한 남자가 아니면 큰 일을 이룰 수 없어요. 그런 사람은 누구도 깨부술 수 없어요.” 어쩌면 오랜만에 찾은 모국에서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도 이것일지 모른다.

 동영상 말미, 그는 말한다. “모두 열심히 걷지요. 열심히들 살아요. 하지만 오르고 싶은 산을 정하지 않은 사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뜻을 세우지 못한 사람이 99%예요. 인생은 한 번뿐이잖아요. 소중히 여겨야죠. 뜻을 세우세요. 뜻을 높이!”

 쉰넷에도 꿈을 향해 질주하는 사나이라니, 아름답지 않은가.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