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음식잡설 ⑧ 이탈리아에서 통한 한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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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이탈리아 피에몬테에 있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일 가시날레누오보’의 생선회와 고추장 소스. 한국인 셰프 안경석의 작품이다.


몇 해 전 함께 일했던 후배가 있다. 그는 기술적으로 훌륭했으며, 침착함과 인내심이 있는 타고난 요리사였다. 내가 보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그였지만 늘 스스로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요리를 만들고 있지만 본토에서 접해보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올랐고, 우여곡절 끝에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미식의 고장 피에몬테의 좋은 식당에 정착했다. ‘일 카시날레누오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식당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미슐랭 별을 획득한 명가다.

 그는 실습생 신분으로 입사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각고의 노력과 한국인 특유의 성실성, 섬세한 기술로 주방장에게 인정받았다. 실습생에서 정식 요리사로 승진한 것이다. 외국인으로서는 드문 일이다. 그런 배경에는 뜻밖에도 한식이라는 열쇠가 있었다. 그가 재미 삼아 선보인 몇 가지 한식 요리가 주방장은 물론 지역사회에까지 큰 화제를 몰고 왔던 것이다. 족발 양념을 응용한 소스의 돼지 안심구이를 비롯한 몇 가지 요리가 당당히 미슐랭 레스토랑의 정찬 메뉴에 공식적으로 등재됐다.

 더 놀라운 건 고추장이 그들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미식가는 대개 간장을 잘 안다. 일식을 통해 이미 그들의 최고급 요리에 간장이 자유자재로 쓰인다. 아예 간장을 ‘기코만’이라는 일본 상표로 대체해 부를 정도다. 간장의 미묘하고 깊은 감칠맛에 반한 미슐랭 별 셋짜리 주방장들이 앞다투어 요리에 응용한 지 십 년이 넘었다. 그래서 한국에도 간장을 쓴다는 얘기를 해주면 오히려 놀란다. 같은 간장 문화권인 한국으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그런데 고추장은 그야말로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닌가. 그는 이탈리아 사람들도 좋아하는 오징어를 회 뜨고, 거기에 초고추장 소스를 냈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은 파스타도 최고 인기 메뉴가 됐다. 다른 이탈리아식 메뉴를 시킨 손님도 종종 이렇게 외친다.

 “고추장 페르 파보레!(고추장 주세요)”

 그의 ‘한식’이 유럽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인정받은 이 사례는 몇 가지 연구할 거리를 던진다. 우선 그의 창의성이 빛을 발했다는 점이다. 초고추장을 만들 때 그들의 식성대로 백포도주 식초를 대신 썼고, 간장 소스를 만들 때는 이탈리아 특산의 발사믹 식초를 함께 넣었다. 뭔가 이국적이면서도 그네들의 입맛에 크게 거스르지 않는 새로운 요리가 된 셈이다. 그러면서도 한식 고유의 유전자는 지켰다. 그는 올리브유만 좋아하는 이탈리아인에게 참기름의 맛을 보여줬고, 매운 것을 먹지 않는 북부 이탈리아인들에게 고추장을 썼다. 이 점이 놀라운 것이다.

 나는 이 사례가 미식의 본고장에서 한식의 어떤 가능성을 엿본 중요한 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요리 인생 삼십 년이 넘는 자신의 주방장은 물론이고, 유럽 주요 지역에서 온 미식가들에게 한식이 통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고 토로했다. 유럽에서 한식은 늘 일식의 ‘아류’ 음식으로 경시돼 온 까닭이다. 겨우 일식의 한 곁가지거나, 중국의 변방 요리 취급을 받아온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에도 한식은 현지인들에게 별 인기가 없었다. 아니, 한식의 존재 자체를 그들은 잘 몰랐다. 지금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유럽 지역의 한식당은 대부분 한국 관광객이나 체류민이 다니는 식당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조국에서 한식 세계화니 뭐니 요란을 떨어도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 후배의 식당에서 놀라운 일이 생기고 나서 주방에는 특별한 코너가 만들어졌다. 그의 요리 작업대 옆에 한식에 필수적인 양념들이 나란히 진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인터넷으로 보내온 현장 사진에는 밀라노에서 사들인 국산 상표의 고추장 통이 보여 이채로웠다. 그는 곧 밀라노의 또 다른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곳에서는 고추장을 넘어 김치와 된장 요리를 선보일지도 모른다. 자, 자못 흥미진진한 한국인 요리사의 도전기가 아닌가. 그의 이름은 안경석이다.  

박찬일 음식 칼럼니스트 chanilpar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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