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41) 트위스트 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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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맨발의 청춘’(1964)에서 트위스트 김(왼쪽에서 셋째)이 신성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중앙포토]


영화 ‘맨발의 청춘’(1964)으로 덕을 본 사람 중 한 명이 트위스트 김(본명 김한섭·1936~2010)이다. ‘맨발의 청춘 배우’라는 후광으로 30년 동안 가수 겸 배우로 먹고 살았다.

 부산에서 건달 노릇도 했던 트위스트 김은 당시 유행한 트위스트 춤바람을 타고 인기 스타로 부상했다. 그는 전국 춤꾼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한 진짜 춤꾼으로, 은막까지 진출한 행운아였다. ‘맨발의 청춘’ 이후 나와 트위스트 김은 서로 다른 길을 갔다. 나는 청춘영화의 아이콘으로 영화에 전념했고, 트위스트 김은 종로 국일관 등 여러 밤 무대를 누볐다.

 1981년 2월 실시된 11대 국회의원 선거 무렵이었다. 5공이 집권하고 영화산업은 붕괴했다. 내가 설 자리는 없었다. 제3당인 국민당을 찾아가 총선에 출마했을 때가 내 나이 44살. 집권당인 민정당에 들어가 훗날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뛰어든 정치라면 대권까지 도전하고 싶었다. 본명 ‘강신영’이로 당선되면 ‘신성일’이란 이름을 지우고 평생 정치인이 되려 했다.

 하지만 선거에서 고배를 마시면서 빚더미에 앉았다. 선거가 끝나니 5000만원의 빚이 남았다. 괴로운 나날이 계속됐다. 내가 빚으로 궁지에 몰렸다는 소식이 퍼졌다. 선거 패배 직후 찾아온 사람이 트위스트 김이었다. 그는 내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신형, 우리 국일관이 수리 중인데 여름에 신장 개입해요. 거기 나가서 돈을 버쇼.”

 나는 “못한다”고 잘라 말했다. 박노식·독고성·장동휘·최무룡 등 선배들은 충무로가 어려워지자 밤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은막스타들이 밤 무대에서 망가졌던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자 트위스트 김은 하얀 것을 내밀었다. 백지수표였다.

 “신형은 폼만 잡고 있으라고. 노래 부르는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백지수표를 보았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등에 진땀이 날 정도의 유혹이었다. 나를 괴롭히던 빚쟁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부’의 표현대로라면 거절하지 못할 제안이었다. 잠시 말미를 갖고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다음 날 또 다시 트위스트 김이 전화를 했다. 그는 내가 느끼는 유혹의 강도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신형, 결정했어요?”

 밤 무대 출연은 청춘스타 신성일의 몰락을 뜻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롱을 받을 게 뻔했다. 내 삶에 대한 경외심을 빼앗기는 일이었다. 제안을 받은 이틀 동안 밤잠을 설쳤다. 그 날 밤 아들 석현이가 꿈에 나타났다.

 “아빠, 국일관에 나가지 말아요.”

 석현이가 울면서 고함치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실감났으면 온몸이 땀에 젖었을까. 가슴 속에 ‘견디자’는 한마디를 새겼다. 다시 트위스트 김이 전화를 했을 때 내 결심을 확고하게 말했다. 그는 “이만한 대우가 없는데…”라며 매우 아쉬워했다. 나는 “우리 아들이 꿈에 나타나 밤 무대 나가지 말라고 하더라”며 그간 일을 사실대로 전했다.

 이후에도 나는 밤에 움직이지 않았다. 이 나이에 이만큼 사는 것도 내 몸을 깨끗하게 지켜온 덕분이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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