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분경금지<奔競禁止>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예종 1년(1469) 11월 4일. 사헌부 소속 아전인 서리(書吏)와 조례(<7682>隷) 등이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의 집을 주시했다. 정인지의 집에 들어가려는 한 인물을 체포하자 가동(家<50EE>)들이 막으면서 서리의 옷고름이 뜯어졌다. 정인지는 도리어 서리 등에게 호패(號牌)를 내놓으라며 꾸짖었다. 사헌부에서 정인지의 국문을 요청하자 예종은 공함(公緘:서면질의서)으로 조사하라고 명했다. 사헌부 서리 등이 정인지의 집 앞을 지킨 것은 고관들에게 뇌물을 써서 인사청탁 등을 하는 분경(奔競)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태종 때 같으면 정인지는 그 자리에서 파면되거나 귀양 갔을 것이다. 태종은 재위 1년(1401) 5월 사헌부와 삼군부(三軍府)에 분경 금지를 명했고, 사헌부와 삼군부는 서리·조례·선전관 등을 보내 인사권자들의 집을 감시했다. 『태종실록』은 “사람이 이르면 존비(尊卑)와 온 까닭을 물을 것 없이 모조리 잡아 가두니, 사람마다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의논이 분운(紛<7D1C>)했다”고 적고 있다. 친족들의 발길까지 끊기자 태종은 5세(世) 친족까지는 방문을 허용하되 금령을 어기는 자는 벼슬이 있는 자는 신문할 것도 없이 파직하고 벼슬이 없는 자는 귀양 보내라고 명했다. 태종의 단호한 조치에 각종 뇌물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쿠데타 동지들과 권력을 나누지 않을 수 없었던 세조(수양대군)는 재위 14년(1468) 3월 “분경을 금한 것은 본시 어두운 밤에 애걸하는 자 때문”이라면서 분경 금령(禁令)을 해제했다. 세조의 후사인 예종은 다시 분경을 금지해 정인지의 집을 감시하고, 신숙주의 집에 찾아갔던 김미(金美)를 직접 친국하다 재위 1년 남짓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쿠데타 공신들의 권력은 왕권보다 막강했던 것이다.

 예종 급서 두 달 후인 성종 1년(1470) 1월 한명회와 신숙주는 “분경 금령이 너무 엄해서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사람과도 상종할 수 없다”면서 분경 금지령을 풀어달라고 요구했고, 예종의 급서를 목도한 성종은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성들은 부패한 공신들의 전횡에 신음했다. 사헌부의 서리와 조례 등은 아전이었지만 태종 때는 고관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의 국법 준수 의지가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실의 암행감찰이 화제다. 불과 30여 명으로 전체 공무원을 상대한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태종 때의 분경 금지 같은 제도 마련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지혜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