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뷰티〉,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봉지

중앙일보

입력

"난 자기 딸 친구를 넘보면서 팬티에다 사정(射精)이나 하는 아버지는 없어졌으면 좋겠어...(중략)... 니가 그래 줄래?"

약간은 불안정해 보이는 비디오 카메라 속에 충격적인 대사로 영화의 도입부를 여는 〈아메리칸 뷰티〉는 미국 백인 중산층 가정에 존재하는 어떤 모습에 관한 영화다. 이것은 그 가정의 불안정함과 비합리성 혹은 가정 구성원 개개인이 가진 정신적 불안함, 무관심, 자기 중심주의로 표현된다.

주인공 래스터(케빈 스페이시)는 딸 제인(도라 버치), 아내 캐롤린(아네트 베닝)과 함께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40대 초반의 사나이다. 평화로워 보이고 안온해 보이는 거리에 집을 갖고 각자 직업을 가진 이 가정은 사람들이 흘깃 보기에는 분명 평범한 가족 공동체로 보인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이 집안은 붕괴와 해체 일보직전의 낭떠러지에 서 있다. 캐롤린은 부동산 중개인으로서 자신이 성공하는데만 몰두해 있고, 래스터는 무기력증과 실업에 대한 스트레스, 공동체 간의 의사소통 단절로 고민하고 있다. 게다가 딸 제인은 이런 부모에 대해 극도의 염증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 변수가 된 것은 제인의 친구인 안젤라(메나 수바리). 고등학생인 딸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래스터는 자기 딸의 친구인 이 아이에게 첫눈에 가버리고 만다. 또 하나의 변수는 이웃에 이사 온 퇴역 해병 장교 가족이다.래스터는 안젤라가 자기 딸에게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는 몸을 만들기 위한 운동에 들어가며, 이사 온 퇴역군인의 아들인 리키에게 마리화나를 구해서 피우게 된다. 게다가 회사 간부의 비밀을 무기로 상당한 퇴직금까지 거두어 회사마저 그만두고, 햄버거 가게에 취직한다. 그 와중에 캐롤린은 부동산 중개인으로 큰 성공을 거둔 버디 케인(피터 갤러거)과 바람이 나고, 제인은 시종일관 비디오 카메라로 자신을 찍어대는 리키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가족 공동체는 붕괴 직전에 직면한다.

〈아메리칸 뷰티〉의 진행은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 세 명이다. 딸 제인에게는 친구 인 안젤라와 리키라는 두 인물이 보태지지만, 이들도 딸의 친구라는 설정만 제외한다면 결국은 래스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이 영화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래스터다. 안젤라는 무기력한 래스터에게 활력을 제공하는 직접적인 요인인데, 리키 역시 비슷한 설정을 가지기는 하지만 상당히 다르다. 그의 캐릭터는 오히려 래스터와 정반대의 의미에 놓여 있다.

리키는 퇴역 장교의 아들답게 처신한다. 완고하며 보수적인 아버지는 그에게 육개월에 한번은 약물검사를 직접 실시하는데, 그는 마리화나를 피워대면서도 굳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본질을 알리려고 하지 않는다. 더불어 충돌도 원하지 않는다. 리키의 취미는 비디오 카메라로 사물을 촬영하는 것인데, 그 이유가 영화의 주제와 관련이 깊다. 즉 그는 일상에 존재하는 것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기 위해 촬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래스터의 딸 제인은 리키에게 아름다움의 인격화된 형태로 다가온다. 이러한 리키의 캐릭터는 래스터의 캐릭터와 사뭇 다르다. 래스터는 일상 속에서 무기력함과 스트레스, 갑갑함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안젤라를 알게 되고, 그것이 그가 변화하는 직접적인 계기지만 그 의미를 실제로 깨닫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다. 결국 그것을 알게되었을 때는 모든 것을 떠나게 되는 때인 것이다.

〈아메리칸 뷰티〉는 매우 역설적인 블랙 코미디이다. 해피 엔딩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미국 백인 중산층의 가슴을 격렬하게 후비고 갈만큼 암울하거나 냉소적이지도 않다(결국 가족은 해체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의 희생이 곧 가족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로서 이 작품은 그 사이를 아주 절묘하게 줄타기하고 있다. 평가는 평가대로 받을 수 있으면서도, 헐리우드 내에서 아웃사이더로서 왕따될만한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각본과 그에 입각한 연출력은 확실히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했기 때문에 골든 글로브는 물론 아카데미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것이리라.

〈아메리칸 뷰티〉의 주제는 리키와 제인이 "바람에 아무렇게나 휘날리는 비닐 봉지를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장면"을 보던 중에 던진, 리키의 대사에 집약되어 있다.

"난 이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이러한 주제의 맥락은 마지막 장면에 불현듯 깨달음을 얻은 듯 가족사진을 보는 래스터의 얼굴과 이어진다.

제목인 "아메리칸 뷰티"는 전형적인 백인 미인(파란 눈에 금발, 즉 극 중 안젤라 같은 스타일), 캐롤린이 키우며 래스터의 상상 속에 등장하는 붉은 장미, 혹은 일상에서 느끼는 소박한 아름다움 중 하나거나 그 모두를 뜻하거나 그렇다. 이것은 시나리오 작가인 알란 볼의 견해다. 케빈 스페이시의 연기는 이번에도 역시 발군이다. 2월 26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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