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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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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써니, 어제만 해도 내 인생은 온통 비에 젖은 듯 했는데/써니, 당신의 미소는 내 고통을 사라지게 하죠/힘든 날들은 가고 밝은 날들이 여기 왔어요”. ‘써니(Sunny)’는 1970, 80년대 디스코 열풍을 이끌었던 팝그룹 보니엠의 히트곡이다. 76년 발매된 데뷔 앨범 ‘테이크 더 히트 오프 미(Take the heat off me)’에 실렸다. 보니엠은 ‘대디 쿨(Daddy Cool)’이 크게 히트하자 후속곡으로 ‘써니’를 밀었다. ‘써니’는 이 밖에 스티비 원더, 프랭크 시내트라와 듀크 엘링턴, 엘라 피츠제럴드, 셰어 등 500명이 넘는 음악인들에 의해 애창됐다. 미국 저작권보호단체 BMI는 ‘써니’를 ‘20세기 명곡 100’ 중 25위에 선정하기도 했다.

 ‘써니’의 원작자는 미국 내슈빌 태생 흑인가수 보비 헵(1938∼2010)이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곡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노래는 고통 속에서 탄생했다. 헵이 25세이던 63년 11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저격당한다. 온 나라를 휩쓴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인 바로 다음날, 형 해럴드가 길거리 칼부림에 휘말려 숨진다. 시각장애인이자 가수였던 부모 밑에서 꼬마 시절부터 형과 공연을 다녔던 헵에게 여섯 살 위 해럴드는 친구이자 멘토였다. 그에게 ‘써니’는 긍정의 힘을 다짐하는 주문이었다. “좋았던 날들을 떠올려라. 인생은 밝게 볼 수도 있고 어둡게 볼 수도 있다. 혼란과 혼돈은 당신을 힘들게 만들 뿐이다.”

 이 노래를 테마곡으로 가져다 쓴 한국영화 ‘써니’가 오늘로 전국 관객 500만 명을 돌파한다. 올해 흥행 1위다. 여고시절 ‘써니’라는 이름의 서클에서 우정을 나눴던 여성 7명이 15년 후 재회하는 내용이다. 말기암, 가난, 시어머니의 박대, 빈둥지증후군 등 현실을 잠시 놔두고 이들은 반짝반짝 빛나던 과거로 돌아간다. “오랫동안 누구 엄마와 아내로만 살았거든. 그런데 나도 역사가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적어도 내 인생의 주인공이란 걸 알았어.” 주인공 나미(유호정)의 고백은 특히 중년 여성관객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써니’의 흥행은 ‘화양연화(花樣年華)’, 즉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잊지 않고 싶어 하는 이들의 심리를 반영한 것이다. 동시에 그만큼 지금이 어려운 시절임을 방증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미소만으론 고통이 사라지기 힘든 시기 말이다. 복고상품이 힘을 얻는 건 주로 ‘써니’하지 않은 불황기니까.

기선민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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