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연의 매력 발전소] 한국전 노병 “무서웠지만 1분도 후회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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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연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


지난해 이맘때쯤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에 맞춰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에서는 때마침 한국을 방문하고 있던 유엔군 참전용사 중 한 분을 초대해 인터뷰하기로 했다. 그랜빌 W 질스트랩. 스튜디오를 찾은 80세의 이 노장은 일반적인 그 연배 어르신들보다 족히 10년쯤은 더 노쇠한 듯 보였으나 표정만은 밝기 그지없었다. 젊은 시절 목숨을 바칠 뻔했던 땅, 한국을 다시 찾은 것에 인터뷰 프로그램까지 출연하게 된 기회가 생긴 것에 감개무량해하는 빛이 역력했다.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한다’는 취지로 기획된 인터뷰였으나 사실, ‘시청률 지상주의’를 생각한다면 이런 종류의 인터뷰는 많은 시청자의 관심을 끄는 데 한계가 있음은 제작진 모두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인터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터뷰어를 당황하게 한 것은 의외의 지점이었다. 솔직한, 너무나도 솔직한 노병의 답변.

군대 다녀온 남성들은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밤을 새울 수 있다는 말은 적어도 이 노병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군대만 다녀온 것이 아닌, 역사적인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 노병은 전쟁과 관련해 그 어떤 무용담도 혹여 영웅담으로 과대 포장될까 우려하는 듯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던 부대에 속해 있던 노병에게 역사의 한 페이지, 한 줄이라도 현장에 있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묻고자 했던 시도는 의외의 벽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너무나 솔직해 인터뷰가 더 진행되지 못할 듯한 단답형 대답. 그는 그가 아는 진실 외에는 단 한 줄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 결심한 듯 전쟁터에 대한 어떤 질문에도 단 한 줄로 대답했다.

 “무서웠어요. 극한의 두려움이었죠.”

 솔직히 고백하건대, 인터뷰어로서는 난감한 순간이었다. 전쟁의 현장에 있던 사람만이 전해줄 수 있는 리얼리티만이 이 인터뷰를 인터뷰답게 할 수 있는 길이었으나 그는 어떠한 수식도 어떠한 수사적 표현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그랜빌 W 질스트랩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갓 청소년을 벗어난 20세였답니다. 무서웠죠. 극한의 두려움이었어요. 나와 전투에 함께 참여했던 전우들도 대부분 극한의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어요. 물론 열심히 총을 쏘고 싸웠죠. 그러나 내 옆의 친구가 총을 맞고 푹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죠. 살아 돌아가겠다, 이런 생각마저도 당시 상황에서는 사치스러운 생각 놀음이었어요. 전쟁은 그런 것이에요. 영화에서 나오는 멋진 영웅, 그럴듯한 영웅담, 멋진 휴먼 스토리… 전쟁의 현장에서 그런 것은 없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많은 사람이, 혹은 소설이나 영화가 그럴듯하게 포장해 그렇게만 세뇌되어 있던 환상을 단칼에 깨버리는 듯한 노병의 솔직함이 진짜배기 진실을 성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없는 것도 있는 듯, 작은 것도 부풀려 말하기 쉬운 세태와 정반대로 솔직함 그 자체로 말하는 노병의 답변이 신선함 그 자체였다. 그 당연한 솔직함이 낯설다면 그 낯섦이 잘못된 것일 뿐.

 신기한 것은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더 귀 기울이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언뜻 들으면 별것 아니게 들릴 수 있는 말들도 더 귀 기울여 들으며 의미 부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의미를 일부러 부여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무게감이 실리는, 의미가 깊은 이야기로 재해석되는 것이다. 왜? 나는 그의 모든 말이 무엇 하나 덧붙이지 않은 진실 그 자체임을 이미 확신했기 때문이다.

 인터뷰 말미에 나는 이렇게 물었다. 어떠한 과장도 수식도 없는 이 노병에게 마지막으로 이걸 묻고 싶었다.

 “어리석은 질문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한번이라도 한국전 참전을 후회해 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순간 노병은 잠시 생각의 끈을 놓은 듯 테이블을 응시하고 있더니 이렇게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뇨, 아뇨.”

 “전쟁의 한복판에서조차도요?”

 “아니요. 전혀요.”

 “말씀하신, 그 극한의 두려움 속에서도요?”

 이즈음이었다. 갑자기 노병의 눈에 굵은 눈물 방울이 맺힌 것은.

 “아뇨…아뇨…. 내 젊은 날의 1년을 보낸 곳입니다. 한국전쟁에서의 1분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죽어야 했던 것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일,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을 한 것 자랑스럽습니다. 한국의 현재를 보세요. 우리는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왜일까. 많이 들어본 듯한 그 말이, 자주 목격하곤 했던 눈물 짓는 모습이 그토록 가슴 찡하게 다가왔던 것은. 오랜만에. 진실이란 걸 본 느낌이었다.

백지연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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