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부도, 워크아웃, 유로 탈퇴 … ‘쿼바디스 그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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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올해의 직원은 파판드레우 총리” 15일(현지시간) 그리스 아테네 의사당 앞에 모인 그리스인들이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를 국제통화기금(IMF) 직원으로 묘사한 깃발을 들고 긴축정책에 항의하고 있다. 시위대는 파판드레우 총리가 자국민보다 IMF 말을 잘 들어 ‘올해의 직원’으로 선정됐다고 비꼬았다. [아테네 AFP=연합]

파판드레우 총리

신타그마(Syntagma)는 그리스 아테네 중심에 있는 광장이다. 신타그마는 헌법을 뜻한다. 1840년대 왕이 시민의 저항에 굴복해 헌법을 제정하기로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런 이름을 붙였다. 170여 년이 흐른 뒤인 15일(현지시간) 신타그마엔 다시 시위대가 모여들었다. 정부의 긴축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시위대와 경찰의 머리 위로 화염병·몽둥이·돌멩이·최루탄이 어지럽게 춤을 췄다. 그 순간 세계 금융시장은 바짝 긴장했다.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의 주가가 1.5% 이상 떨어졌다. 국제유가도 배럴당 100달러 선에서 95달러 수준으로 미끄러졌다. 반(反)긴축 시위의 여진은 뒤이어 열린 아시아 시장도 강타했다. 한·중·일 주가가 1% 넘게 하락했다.

그리스 파업·시위는 2009년 12월 재정위기가 불거진 이후 아테네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15일 신타그마광장 시위는 글로벌 시장 참여자에겐 위기의 위기로 비쳐졌다”고 로이터 통신은 이날 전했다. 로이터는 런던시장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파국을 촉발시키는 도화선이 맹렬하게 타는 듯이 보였을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그 파국은 그리스의 유로(euro)화 포기다. 미국 UC버클리대 배리 아이켄그린(경제학) 교수는 지난해 말 “그리스가 유로화를 포기할 가능성은 아주 작지만, 그리스인들의 저항이 심해지면 아테네 정치 리더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긴축 반대 시위의 파괴력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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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이날 그리스 의회는 저항에 밀려 2차 긴축방안 논의를 중단했다. 추가 긴축은 1460억 달러(약 159조1400억원)에 이른 2차 구제금융의 필수조건이다. 시위는 한술 더 떠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58) 총리의 리더십마저 흔들어 놓았다. 재정위기에 이어 정치위기마저 발생한 셈이다. 이날 파판드레우 총리는 긴급히 마련한 TV연설에서 내각을 해산하고 다른 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의회에 신임을 묻기로 했다. 리더십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극약처방을 불사한 것이다.

 런던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파판드레우의 처방에도 시위가 진정되지 않으면 추가 긴축은 불가능하다는 쪽”이라고 파이낸셜 타임스(FT)가 이날 전했다. 이후 그리스 정부는 긴축보다 경기 활성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재정이 바닥난 상황에서 선택할 카드는 통화량을 늘리는 일뿐이다. 이는 유로 체제 아래선 불가능하다. 통화량 조절 권한이 유럽중앙은행(ECB)의 몫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는 유로존을 탈퇴해 옛 통화인 드라키마를 부활시킬 수 있다. 일부 전문가는 그리스 정부가 쿠폰을 찍어 재정지출을 늘리는 방식으로 경기를 부양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어느 쪽이든 유로 체제의 위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15일 유로화 가치가 급락한 까닭이다.

 그리스 파업·시위 사태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장 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의 타협을 더욱 어렵게 할 가능성도 크다”고 블룸버그는 이날 전망했다. 현재 두 사람은 2차 구제금융을 편성하면서 채권금융회사들의 고통분담 방안을 놓고 대립하고 있다.

 메르켈은 “채권금융회사들이 그리스 빚을 일부라도 탕감하거나 만기를 연장해주지 않으면 2차 구제금융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트리셰는 “ECB 를 포함한 채권금융회사들이 그리스에 꿔준 돈을 한 푼이라도 받지 못하면 글로벌시장은 패닉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 한다. 메르켈과 트리셰 진영은 이달 19일 막판 타결을 시도한다. 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그리스 시위 사태는 ECB 등 채권금융회사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서 “메르켈과 트리셰가 채권금융회사들의 고통분담에 합의하지 않으면 그리스 사태는 채무불이행(디폴트)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글로벌 시장이 그리스 채권 원금 50~70% 정도의 손실을 감당하지 못해 패닉 상태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메르켈과 트리셰가 19일 극적으로 타협하면 그리스는 채무구조조정(워크아웃) 절차를 밟을 수 있다. 만기 연장과 10~20% 정도 원금 탕감이 워크아웃 주요 내용일 듯하다. 이 경우 “글로벌 시장은 자금경색에 시달릴 수 있다”고 블룸버그는 내다봤다. 디폴트보다는 덜하겠지만 채권금융회사들이 손실 자체를 피할 수는 없어서다. 그리스 사태 앞날엔 밝은 구석이 거의 없는 셈이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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